많이 아는 사람과 현명한 사람은 다르다. 소화기를 쌓아 두고도 사용할 줄 모른다면, 눈앞의 불을 끌 수 없다. 상황에 맞게 연장을 잘 활용해야 내 삶을 채워줄 씨앗이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옛글을 뿌리 삼아 우리들의 삶을 살핀다. 쉬이 읽히지 않는 한문학 고전에 기대었으니, 좋은 줄은 알지만 입에 쓴 보약이지 않을까. 그러나 저자는 약이 아니라 멘터로 삼는 법을 보여 준다. 고전을 ‘가르치기’보다 옛글과 ‘대화하는’ 현장을 만나보길 바란다.
우선, 출발선을 보자. 저자는 옛글들을 ‘지금-여기’에서 벌어진 쟁점에 뛰어들게 만든다. 옛 사상가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 시대의 시사논객이 된다. 예를 들어, 부동산 문제는 민생 정치의 대표 현안이다. 연암 박지원은 ‘한민명전의’에서 토지 문제의 폐단과 부동산 개혁안을 제시한다. 오늘자 신문기사로 읽힐 만큼 생생하니, 그의 훈수가 예사롭지 않다.
최근 유엔으로부터 지적받은 한국인의 단일민족 의식도 그렇다. 외국인 노동자와 베트남 신부들은 우리가 아쉬워서 받아들였는데도 차별과 편견으로 대한다.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실록’에 의하면 태종과 세종은 여진, 일본, 아랍 출신의 귀화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벼슬도 주고 임금 차별도 하지 않았다 하니 지금 우리들의 ‘세계화’ 구호가 부끄러워진다.
무엇보다 고전을 독해하는 것은 자신의 눈을 갖는 일이다. 내 사고의 주인은 누구인가. 중국 명대의 사상가 이탁오는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따라 짖고, 왜 짖느냐고 물으면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며 스스로를 비판한다. 영조 때의 문인 조귀명도 바닷가에서 60년 동안이나 조수를 연구한 사람을 무시하고, 성리학만 우대하는 세태를 비판한다. ‘자득(自得)’의 가치가 폄훼되는 시대에는 창의성이 사라진다. 원리도 모르면서 점수만 받으면 그만인 우리가 꼭 들어야 할 소리다.
그런데 옛 책이라 해서 모두 다 귀하고 훌륭할까. 조선 세종 때 편찬한 윤리책인 ‘삼강행실도’에는 충신 효자 열녀 사례 각각 110가지가 실려 있다. 그중 열녀편을 보면 무려 80명이 죽음과 자살로 얻은 칭송이다. 국가가 나서서 자살을 권유하는 윤리라니, 그 잔혹함과 비합리성이 끔찍하다. 맹목적 수용은 무지보다 위험하다.
최근 논술과 구술 때문에 독서가 강조되고 있지만, 까다롭게 느껴지는 옛글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시대적 맥락과 저자의 문제의식을 모르는 탓이다. 그러나 고전도 저자가 당대에 던진 발언이며, 완벽한 책이 아니다. 공감하면서 읽고 비판적으로 적용해 보자. 우리가 사는 지금이 더 잘 보일수록 그만큼 지적 내공도 깊어질 것이다.
권희정 상명대부속여고 철학·논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