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TV’의 산실 삼성전자 ‘창조경영’ 현장 VIP센터
《베이지색 페인트가 칠해진 5층짜리 나지막한 건물 4개 동이 전부였다.
삼성전자 기술총괄 산하 가치혁신프로그램(VIP·Value Innovation Program)센터는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의 남쪽 한구석에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지난달 말에 찾아간 그곳은 울어대는 매미 소리와 어울려 대학 기숙사 같은 한가로움마저 묻어나는 듯했다.
국내 최고 기업 삼성전자의 ‘창조 경영’ 현장을 제대로 찾아온 것인가.
분명 VIP센터는 2, 3년 전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고 들었다. 히트 상품 중 하나인 ‘보르도 TV’의 산실도 여기라고 했다.》
건물 5층의 한 프로젝트 룸. 한가로운 바깥 분위기와 달리 방 안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5명의 사람들이 열심히 무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이날은 3주 동안의 VIP센터 생활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아이디어를 정리하는 날이었다. 신개념의 디스플레이 상품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 이 팀의 목표였다.
방 한구석엔 A1 크기의 종이가 두루마리처럼 말려 잔뜩 쌓여 있다.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끌어내기 위해 이곳에서 사용하는 중요한 ‘도구’다.
구성원들이 모두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낼 수 있다. 그렇게 낸 아이디어는 A1 용지에 기록돼 벽에 붙여진다. VIP센터 김동준 부장은 “아이디어를 적은 종이가 벽을 다 채우고도 모자라 천장을 가로지르는 보에도 붙여져 마치 종이커튼이 달린 것 같은 장면을 연출하는 때도 있다”고 말했다.
회의 시간은 구성원이 정한다. 공장 기숙사였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숙박을 하며 회의를 할 수도 있다. 1998년 처음 생겼을 때는 ‘24시간 체제’가 의무였지만 지금은 그것마저 구성원이 선택한다. 거리로 나가 소비자를 관찰하거나 미술전을 관람하거나 영화를 봐도 된다. 자신의 업무만 팠던 사람들에게 창의적인 생각을 불어넣기 위함이다.
자유로운 분위기는 근본적인 질문을 낳는다. 보르도 TV는 ‘꺼져 있는 TV는 과연 무엇일까’ 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실제로 TV는 켜져 있는 시간보다 꺼져 있는 시간이 더 길다. 여기서 거실 인테리어와 잘 어울리는 TV 개념이 나왔고, 고급스러운 포도주 잔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의 보르도 TV가 탄생했다. 보르도 TV는 올해 8월, 시판 1년 4개월 만에 520만 대가 팔려 세계적인 히트 상품이 됐다.
센터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업무를 모두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와야 한다. 일상 업무로부터 구성원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들어오는 사람들은 통상 5명 안팎. 평소에는 자주 만나기 어려운 유관 부서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소비자 트렌드에 기반을 둔 마케팅 담당자의 아이디어가 같은 책상 위에서 바로 엔지니어의 검토를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팀은 비주얼디스플레이사업부 내 상품기획, 회로개발, 소프트웨어, 개발기획, 외장 담당자들로 구성됐다. 민선화 개발기획그룹 선임연구원은 “각자 자기 분야의 대표자가 돼 방관자가 없으니 일반 회의 때보다 훨씬 밀도 있는 논의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디어를 정리하다가 중요한 결정이 필요하면 해당 임원이 VIP센터로 와서 결정해 줘야 한다. 진행 상황을 설명하는 보고서도 별도로 만들지 않는다. 아이디어 회의 때 사용하던 A1크기의 용지를 그대로 사용한다. 발췌할 정보는 디지털카메라로 찍어서 활용한다.
신개념 디스플레이 개발팀은 3주 동안 매일 오전 8시 반에 출근해 오후 8시 반까지 함께 시간을 보낸 뒤 최종 아이디어를 생산했다. 경영진의 최종 결재가 떨어지면 시제품 개발에 나설 예정.
윤의식 메카(기구개발)그룹 선임연구원은 “대학 시절 이후 처음으로 자유로운 발상이라는 것을 해봤다”며 “다른 부서 직원의 업무와 상품 기획의 전반적인 과정을 알게 된 것도 큰 소득”이라고 말했다.
VIP센터 이동진 상무는 “처음에는 원가절감을 위한 아이디어가 많았지만 2, 3년 전부터 신상품 기획 비중이 늘고 있다”며 “소니의 워크맨같이 새로운 지평을 여는 상품도 이곳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돌아 나오는 길. 초라해 보이는 시설이 오히려 희망적으로 다가왔다. 어느 기업이든 큰돈 들이지 않고 지혜를 모으면 얼마든지 창조적인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수원=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