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복 국가정보원장(오른쪽)이 1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되었던 한국인들의 귀국 비행기 안에서 인터뷰를 자청해 피랍자 석방협상 과정 등을 설명하고 있다. 정보기관장의 신원 노출로 논란을 빚은 김 원장 옆에 앉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는 피랍자 석방 협상에 직접 참여한 국정원 직원. 나성엽 기자
아프가니스탄 한국인 피랍사태는 마무리됐지만 탈레반 무장단체와의 인질 석방 협상을 현장에서 진두지휘한 김만복(61) 국가정보원장의 행태에 대한 논란은 그치지 않고 있다.
김 원장이 22일 내전상태인 아프간으로 출국해 협상 교착국면을 타개하고 인질이 풀려나게 한 공로는 인정할 만하다. 하지만 김 원장이 적극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언론에 노출시킨 점은 문제로 지적된다.
▽국정원장, 내가 나서야 한다?=김 원장의 현지 활동이 알려진 것은 지난달 31일 석방된 피랍자들이 묵고 있던 카불의 한 호텔에 나타나 이들과 한국에 있는 가족들의 통화를 주선하는 모습이 포착되면서부터. ‘음지에서 일하는’ 정보기관의 수장이 테러 단체와의 협상에 관여했다는 사실이 공개된 것.
이후 김 원장의 ‘노출’은 계속됐고 강도도 세졌다. 1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호텔에서는 인터뷰까지 했다. 김 원장은 “협상을 진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판단 아래 카불에서 현장지휘를 했다”며 현지 최고 책임자로 활동한 사실을 스스로 공개했다. 그는 “현장에서 지휘함으로써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할 수 있었고 아프간의 열악한 통신 사정을 극복한 것은 물론 협상팀과 본국의 통신 과정에서 혹시 있을지 모를 제3자의 감청 등을 방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귀국길 비행기 내에서는 기자들을 1등석으로 불러 간담회를 열었다. 국정원은 김 원장의 역할을 자랑이라도 하듯 1일 기내에서 ‘국민의 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라는 제목의 A4용지 3장 분량의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국정원은 자료에서 ‘김 원장은 국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신변 안전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국정원 간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출국했다’ ‘국정원 대테러 요원들은 김 원장의 지시에 따라 막판 협상을 주도했다’고 밝혔다.
2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한 뒤에는 김 원장이 함께 귀국한 피랍자들 뒤에 서 있자 자신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도록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2일 “피랍사태 해결의 중대 고비를 앞두고 동원 가능한 모든 채널의 활용을 위해 정보 라인의 최고 책임자로서 간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1970년대 중앙정보부도, 80년대 안기부도 아닌 21세기형 국정원 모습을 보여 주는 것 아니냐”고 김 원장을 두둔했다.
▽“사지(死地)라도 다시 가겠다”=김 원장은 2일 피랍자 19명과 귀국한 뒤 국정원에서 열린 간부회의에서 “앞으로도 우리 국민이 위협에 처하면 설사 그것이 사지라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도 이날 보도 자료를 통해 “국정원장은 일반 직원들과 달리 공개 가능한 직책이고, 정부 테러대책상임위원장으로서 필요할 경우 활동을 공개할 수 있다”고 해명했다.
정치권은 김 원장의 노출에 대해 ‘부적절한’ 행태라고 지적했다.
한나라당 나경원 대변인은 “인질 석방 과정에 있어서의 업무 수행에 관해 보도 자료를 통해 자랑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공을 깎아내리는 행동”이라며 “국회 정보위에 협상 과정을 낱낱이 보고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지적했다.
대통합민주신당 이낙연 대변인도 “협상 자체는 문제 삼을 수 없지만 정보기관 수장이 외부에 노출됐다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김 원장의 정치 행보?=김 원장의 이런 언론 노출은 속셈이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온다.
1974년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에 발을 들여놓은 33년 경력의 ‘정통 정보맨’ 김 원장이 ‘동선(動線) 보안’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1차장(해외담당) 재직 시절인 지난해 7월 모교인 부산 기장중 총동창회장을 맡았고, 그해 11월 원장 취임 이후 기장군 지역 주민들에게 국정원 견학을 시켜 주고 지역 주민의 경조사에 화환을 보내는 일도 많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김 원장 주변에서 내년 총선에 출마하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다. 전직 국정원 한 간부는 “김 원장은 기장에 자주 내려가다가 (김승규 원장에게) 몇 차례 주의를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김승규 전 국정원장이 후임자 인선과 관련해 김 원장을 반대한 것도 그의 ‘정치적 행보’와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 전 원장은 “내부 발탁은 국정원 개혁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다”며 “내년은 대선의 해인 만큼 정치적 중립을 지킬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태원 기자 triplets@donga.com
두바이·인천=나성엽 기자 cp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