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최근 ‘언론윤리위원회법(언론법)’으로 말미암아 정부와 일부 언론 간에 조성된 감정적 대립 상황을 나는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1964년 9월 4일. 정부의 언론법 반대 언론사들에 대한 탄압을 규탄하는 여론이 들끓자 박정희 대통령은 특별 담화를 발표했다. 그는 담화에서 “나는 오늘 정부가 취한 몇 가지 지나친 조처들을 즉각 시정할 것을 지시했다”고 밝혔다.
‘언론법 파동’이 시작된 것은 8월 2일. 국회는 사흘 연속 철야 회의 끝에 언론법을 통과시켰다. ‘사회혼란을 부추기는’ 언론에 대해 신문 용지 배급 제한이나 은행 융자 거부 등을 통해 사실상 정간(停刊)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내용이 법안에 포함됐다.
겉으로는 언론사들의 참여와 자율 규제를 표방한 법이었지만 실제 내용은 비판적인 언론을 직접 통제하려는 악법이었다. 한일 회담 반대 시위 등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지자 이를 언론의 선동 탓으로 돌리고 통제에 나선 것이었다.
법은 8월 5일 공포됐다. 전국에서 언론인들의 반대 성명이 잇따랐다. 기자들은 언론법 반대 투쟁을 강화하고자 8월 17일 기자협회를 출범시켰다.
정부도 물러서지 않고 서둘러 언론윤리위원회 소집에 착수했다. 반대하는 언론사에 대한 공작도 병행됐다. 일부 발행인에 대해서는 경찰을 동원해 압력을 행사했다. 견디지 못한 발행인들이 속속 정부에 굴복했다.
위원회 구성을 위한 서면 결의가 마감된 8월 28일, 위원회 참여를 거부한 언론사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대구매일신문 등 4개사에 불과했다.
이 4개사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한층 거세졌다. 광고주들에게 유형 무형의 압력을 가했고 심야 신문 배달을 제한했다. 해당 신문 소속 기자의 여권 발급을 중지했으며 해외특파원에 대한 월급 송금까지 막았다.
9월 2일 함석헌 장준하 한경직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범국민적 반대 투쟁을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국제언론인협회(IPI)도 언론법 폐지를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박 대통령이 4일 보복 조치를 철회한 것은 이 같은 여론에 사실상 백기를 든 것이었다. 그는 담화에서 “과연 국회가 불필요한 법을 만들었다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라며 언론법의 정당성을 강조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고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닷새 뒤인 9일 언론법 시행 전면 보류를 결정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