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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고추잠자리

입력 | 2007-09-05 02:59:00


바라만 보아도/눈물이 날 것 같은/하늘이 열리고/산 아래 노을이 누우면/바람도 가는 길을 멈추고/숨을 죽인다/비단 날개로/마지막 남은 햇살을 보듬은/잠자리 몸통도 노을에 젖어/더욱 빨갛게 익어가고/아내 속눈썹처럼 가벼운/날개를 편다/그러면/금빛으로 물든 가을 하늘/불타는 고추잠자리 두 눈에/잠겨 있다(2003년에 발표한 김정호의 시 ‘고추잠자리’). 누구나 고추잠자리에 대한 아련한 추억 한두 편은 있을 터이다.

▷고추잠자리는 ‘섹시한’ 곤충이다. 이름에서 풍기는 뉘앙스도 그렇거니와 머리 몸통 꼬리를 아우르는 빨간 색깔이 섹시하다. 무엇보다 고추잠자리는 교미를 자주 한다. 어느 시인은 고추잠자리의 교미에 ‘공중 섹스’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모든 고추잠자리가 빨간 것은 아니다. 수컷만이 빨갛다. 처음엔 노란색을 띠지만 초가을, 교미할 때가 되면 빨갛게 변한다. 그래서 고추잠자리의 빨간색은 혼인색(婚姻色)이고, 유혹의 색이다.

▷고추잠자리는 코스모스와 함께 가을의 전령이다. 한낮 뙤약볕 아래서도 한 마리의 고추잠자리를 보고 가을이 왔음을 느낀다. 농촌은 물론 도시에도 흔해 아파트 단지에서 잠자리채를 들고 몰려다니는 꼬마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이런 풍경도 점점 보기 어려울 듯하다. 서울시가 ‘서울시 보호 야생 동식물’ 25종에 고추잠자리를 포함시키고, 이달부터 고추잠자리를 잡는 사람에겐 100만 원의 과태료를 물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고추잠자리 보기가 쉽지 않다. 도시 주변 개발로 유충의 서식지인 습지나 물웅덩이가 급속히 사라진 탓이라고 한다. 고추잠자리뿐 아니다. 보호 야생 동식물에는 다람쥐도 들어 있다. 등산객들이 밤과 도토리를 다 주워 가는 바람에 아사(餓死) 위기에 내몰린 데다 들고양이에게 잡아먹히기도 해 개체가 급속히 줄고 있다고 한다. 지금부터라도 보살피지 않으면 앞으로는 동물 도록(圖錄)에서나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올가을 고추잠자리 잡아 보겠다고 잠자리채까지 사 놓은 아들 녀석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