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취임 이후 유엔에서 처음 열린 대변인 브리핑이 끝난 뒤 미셸 몽타스 사무총장 대변인은 기자들에게 반 총장 영문 이름을 ‘Ban Ki-moon’으로 표기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발음도 ‘원음’에 가깝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일부 기자가 ‘반(Ban)’을 영어에서 ‘금지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는 ‘ban(밴)’처럼 발음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제 유엔에서 반 총장 영문 표기를 실수하는 기자는 없다.
그런데 반 총장처럼 유명 인사가 돼야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신경을 써 주지, 평범한 한국 사람들이 미국에서 살다 보면 이름 때문에 곤란을 겪을 때가 많다.
기자의 영문 이름은 ‘KONG JONG SIK’이다. 몇 달 전에는 주문한 책을 찾으러 대형 서점에 간 적이 있었다. 서점 직원이 20분이 지나도 책을 찾지 못했다. 한참을 헤맨 끝에 책을 들고 오더니 “‘SIK’이란 고객 이름으로 책이 있었다”고 말했다. 미국인들에겐 ‘공·종·식’ 세 글자가 모두 생소하기 때문에 책을 정리한 직원이 ‘식’을 성(姓)으로 착각한 것이었다.
유엔을 출입하면서 만난 한 미국인 기자는 필자를 안 지 6개월이 넘도록 ‘공’이라는 성씨가 헷갈려 지금까지도 ‘미스터 김’이라고 부를 때가 많다.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영어식 이름을 하나 지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이름을 갖는다는 게 영 어색해서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있다.
기자의 딸도 마찬가지였다. 첫해에는 친구들이 ‘정인(JUNG IN)’이란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 말을 잘 건네지 않는다고 불평이 대단했다. 결국 그 다음 학년으로 바뀌었을 때에는 친구들에게 아예 마지막 음절인 ‘인’과 발음이 비슷한 ‘린(Lynn)’으로 자신을 소개하도록 했다. 그 뒤에는 ‘친구들이 말을 건네지 않는다’는 불만이 사라졌다.
기자의 이름은 적어도 발음은 어렵지 않다는 점에서 그래도 다행일지 모른다. 한국 이름에 많이 들어가는 ‘은’, ‘흥’, ‘회’, ‘계’ 등을 미국인들이 정확히 발음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런 발음 자체가 영어에서는 낯설기 때문이다.
어떤 한국 이름 발음은 영어에선 좋지 않은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한국 이름에 흔한 ‘석’이라는 발음은 영어에선 욕으로도 많이 쓰이는 ‘suck(빨다)’과 발음이 같다. ‘범(bum)’도 영어로는 ‘엉덩이’라는 뜻이 있다. ‘국(gook)’은 동양인을 낮춰 부를 때 가끔 쓰이는 속어이기 때문에 영문 표기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미국에 오면 아예 영어식 이름을 별도로 갖는 한국인이 많다. 아니면 이름의 영문 표기 첫 글자를 따서 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요즘 미국에서 눈부신 경기를 펼치고 있는 프로골퍼 최경주 씨는 영문 이름을 ‘KJ CHOI’로 쓴다.
얼마 전에는 인터넷에서 영어 이름을 검색어로 쳤다가 영어 이름 작명 사이트가 무더기로 뜨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수요가 많아지면서 벌써 시장(市場)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요즘 젊은 부부들 중에는 태어날 아기 이름을 아예 한국어와 영어로 함께 쓸 수 있도록 짓는 사례도 많다고 한다. 유진, 지나 등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대표적인 이름이다.
세계화 현상이 이젠 이름 짓는 영역에까지 들어온 것이다. 불가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체성의 상징인 이름까지 영어 발음과 의미를 고려해야 하나’라는 데 생각이 미치면 좀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공종식 뉴욕 특파원 k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