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생산원가 줄인뒤 값 안내려도 제재 가능’ 법개정 추진
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들의 기술개발 등 원가절감 노력을 원천 봉쇄할 수도 있는 법령을 추진 중인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5일 재계와 공정위에 따르면 공정위는 지난달 13일 시장지배적 사업자의 가격남용행위 판단 기준을 강화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공정거래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뒤 이달 3일 의견 수렴절차를 마친 것으로 확인됐다.
개정안에 따르면 시장점유율이 높은 기업은 기술개발 등을 통해 원가(비용)를 절감할 경우 기존 상품 가격을 올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만 해도 공정위의 제재를 받을 수도 있다.
재계는 “시장원리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적인 개악(改惡)”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 ‘원가절감하면 제재?’
공정위가 ‘보완’하겠다는 현행 공정거래법 시행령 제5조는 주로 시장지배적 사업자가 제품 가격을 지나치게 올리는 경우를 제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공정위는 기업이 생산 원가를 절감할 경우 기존 상품 가격을 그대로 유지만 해도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제1항)을 추가했다.
또 제품 가격이나 이익률이 같은 업종의 ‘통상적인 수준’보다 ‘현저히’ 높을 때도 제재하겠다는 조항(제2항)을 신설했다.
공정위는 규제개혁위원회와 법제처 심사 등을 거쳐 11월 4일 이 개정안을 시행할 예정이다.
기업들은 개정안에 대해 기업의 상품 가격과 이익률을 정부가 직접 통제하겠다는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개정안은 세계무대에서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는 우리 기업의 손발을 묶을 가능성이 높다”고 비판했다.
공정거래 전문 변호사는 “‘현저하다’거나 ‘통상적’이라는 모호한 표현으로 행정 관청의 자의적인 재량이 커질 수 있다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부 정부 부처에서도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개정안을 검토한 한 정부부처 공무원은 “처음 시행령 개정안을 받아 봤을 때 숨이 턱 막혔다”며 “가격을 올리지 않아도 비용만으로 가격의 적정성을 판단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기업의 원가절감 의지를 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기업들은 벙어리 냉가슴
기업들은 공정위와 청와대 눈치를 보느라 드러내 놓고 반발은 못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부글부글 끓고 있다.
특히 정보통신부가 원가보상률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요금을 규제하고 있는 통신업계는 이중규제를 받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가격이나 이익률을 동종업종의 통상적인 수준’으로 맞추도록 한 부분도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정부가 잘나가는 기업의 이익률이 높다고 판단해 시정명령을 내리면 이들 업체는 가격을 낮춰 ‘덤핑’ 처리를 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중소기업들이 줄도산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설명이다.
더욱 큰 문제는 개정안이 기업들의 미래 성장 동력 확보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기업이 신사업이나 신제품 개발에 성공하더라도 일정 기간 시장에서 지배력을 갖고 투자금을 회수할 수 없다면 새로운 도전이나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 측은 본보가 관련 취재에 들어가자 “추가 의견 수렴 후 수정할 수 있다”며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공정위는 올해 1월 현장조사 때 각종 자료를 봉인(封印)할 수 있는 ‘봉인조치권’을 신설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을 때도 경제계 반발로 최종안에서 이 조항을 뺀 적이 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차지완 기자 cha@donga.com
김용석 기자 nex@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