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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패션의 新교과서 ‘파파라치 룩’

입력 | 2007-09-07 03:01:00


《“어머 예쁘다.”

주말에 한 TV 드라마를 보던 여성 시청자들은 드라마보다는 탤런트 수애가 입은 옷에 관심을 보였다. 흰색 티셔츠에 남자들의 양복조끼와 비슷한 옷을 덧입은 수애의 패션은 독특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세련된 이미지마저 풍겼다.

이런 옷차림은 미국 영화배우 ‘시에나 밀러’ 풍이다. 그녀가 입고 거리를 활보하다 유명인을 쫓는 파파라치의 카메라에 잡혔다. 이 사진은 인터넷 등을 타고 퍼졌다. 한국 여성들이 이 옷의 스타일을 본뜨면서 국내 거리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게 됐다.

이뿐만 아니다. 삼성전자의 애니콜 광고에 영화배우 전지현이 입고 나오는 미니스커트는 일반 미니스커트와 조금 다르다. 스커트라기보다는 치마 길이가 짧은 원피스다. ‘미니 드레스’라고 불리는 이 옷은 영국 출신인 할리우드 모델 케이트 모스가 즐겨 입는 스타일이다. 》


▲ 촬영·편집 : 박영대 기자

할리우드 스타의 평상복

서울 거리서 곧바로 유행

최근 할리우드 스타들이 즐겨 입는 옷이 곧바로 한국에서 유행하는 일이 많아졌다. 미국의 다우존스지수가 한국 코스피지수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증시 동조화’ 현상처럼 할리우드 패션도 시차 없이 한국에 수입되고 있다.

‘패션 동조화’는 과거에도 있었지만 요즘은 그 경로가 달라졌다. 예전엔 미국 배우들이 ‘프렌즈’ ‘섹스 앤드 더 시티’ 등 TV 프로그램에 입고 나오는 옷이나, 명품 브랜드들이 출시하는 옷들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 한국의 패션 1번지인 서울 강남구 청담동 명품거리와 압구정동 로데오거리의 유행 창조의 원동력은 ‘파파라치 룩’이다. 스타들이 디너쇼나 시상식 같은 공식 행사에 차리고 나타나는 비싼 옷이 아니라 쇼핑하고 친구들과 만나는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입고 나온 옷들이다. 파파라치에게 포착된 스타들의 일상 패션 스타일이 인터넷을 타고 실시간으로 유통되면서 한국의 다운타운 패션을 바꾸어 놓고 있다.

다리에 착 달라붙는 스키니 진, 운동선수들의 가방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백, 얼굴의 반을 가리는 큰 선글라스, 치마 길이가 미니스커트만큼 짧은 원피스인 미니 드레스, 길이가 한 뼘 될까 말까 한 반바지, 겨드랑이를 파고드는 클러치 백, 남자 친구에게나 어울릴 법한 양복조끼 등이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대표적인 아이템이다.파파라치 룩은 스타일을 따왔다는 점에서 명품을 그대로 복제한 ‘짝퉁’은 아니다.

○ 스타들의 ‘실제 생활’ 맵시에 동질감

파파라치 컷에는 스타들의 일상이 담긴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손에 들고 거리를 걷거나, 쇼핑백을 들고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다. 패션사에서 협찬을 받은 옷을 입어야 하는 드라마나 영화 혹은 무대에서는 볼 수 없는 패션 스타일이다.

연출되지 않은 ‘실제 상황’에서 찍힌 그들의 모습은 외출하려고 옷장을 열어 놓고 한참을 망설이며 한숨을 쉬는 여성들에게 ‘좋은 답안’이 되기도 한다.

케이트 모스, 린제이 로한, 메리 케이트 올슨, 커스틴 던스트, 패리스 힐튼, 시에나 밀러…. 개성 넘치는 스타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젊은 스타들은 한국 여성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됐다.

케이트 모스의 파파라치 컷은 마크제이콥스의 앵클 부츠, 발렌시아가 핸드백, 이브생로랑의 뮤즈백이 날개 돋친 듯 팔리게 만든 공신이다.

160cm 정도 되는 키에 깡마른 체형의 메리 케이트 올슨은 비슷한 체형을 가진 여성들에게 니트와 미니스커트만으로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법을 알려주었다.

다른 스타들에 비해 통통한 시에나 밀러는 상하의를 무채색으로 통일한 스타일로 실제보다 날씬하게 보이는 ‘요술’을 연출해 비슷한 체형을 가진 여성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패리스 힐튼의 파파라치 컷은 원피스로 멋을 내고 싶은 여성들에게 ‘참고서’가 되고 있다.

홍익대 패션디자인과 간호섭 교수는 “스타의 연출되지 않은 실제 모습을 찍은 파파라치 컷은 ‘스타들이 일반인과 다르지 않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면서 ‘파파라치 컷에서 그들이 입은 옷은 거부감 없이 다가오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쉽게 흡수할 수 있어 그들의 스타일이 대중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스타들의 ‘연출되지 않은 사생활’ 옷차림

나에겐 패션의 완성이죠

○ ‘샤넬 구두’가 아니라 ‘린지 로한 구두’?

명품 로고는 패션 아이콘으로 추앙받는 할리우드 스타들 앞에서 작아진다.

명품 브랜드 숍에서는 ‘샤넬 구두’ 대신 ‘린지 로한 구두’, ‘루이비통 핸드백’이 아니라 ‘케이트 모스 핸드백’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나인식스 뉴욕, 시스템 등 10여 개 기성복 브랜드는 케이트 모스가 유행시킨 검은색 조끼를 이번 가을 신상품으로 내놨다. 파파라치 컷의 단골 주인공인 케이트 모스는 직접 의류 디자인에도 참여한다. 그가 디자인에 참여한 영국 브랜드 톱숍의 아이템은 일반 톱숍 아이템에 비해 25% 정도 많이 팔렸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콧대 높은 명품 브랜드들이 파파라치 사진을 마케팅에 활용하기도 한다. 루이비통은 시에나 밀러가 메고 다니는 ‘러브백’을 홍보할 때 파파라치 사진을 사용했다. 루이비통 코리아 관계자는 “자주는 아니지만 필요할 때는 파파라치 컷을 홍보에 이용한다”고 말했다.

인터넷 쇼핑몰과 의류 도매시장에서도 파파라치 룩이 인기다.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면 통상 사진 2장이 동시에 뜬다. 한 장은 할리우드 스타의 모습이 담긴 파파라치 컷이고, 다른 한 장은 파파라치 컷에 찍힌 ‘그녀’가 입은 옷이나 가방, 신발을 클로즈업한 사진이다. 스타가 입거나 멘 그 옷 혹은 그 가방이란 뜻이다.

인터넷 쇼핑몰 ‘앤디몰’을 운영하고 있는 조은희 씨는 “케이트 모스가 입은 짧은 반바지 없느냐, 린지 로한이 입은 흰 셔츠가 없는지 문의를 하기 때문에 사진을 두 장씩 띄워서 판매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리의 보세 가게나 서울 동대문의 의류 도소매 시장에서도 ‘케이트 모스 룩’이나 ‘시에나 밀러 스타일’ 등의 이름을 내걸고 팔고 있다. 동대문에서 도매상을 하고 있는 조창동 씨는 “잡지를 찢어 갖고 와서는 ‘이런 옷은 없느냐’고 묻는 손님이 많기 때문에 아예 외국 배우들의 이름을 붙여서 팔고 있다”고 말했다.

○ 왜 파파라치 룩에 열광하나

패션쇼의 런웨이에 나타난 모델들의 옷차림은 일반인들에게는 부담스럽지만 파파라치 컷에 등장한 스타들의 모습은 ‘쉽게 따라할 수 있겠다’는 느낌을 준다.

회사원 주지영(33) 씨는 “예전에는 무대의 모습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외국의 유명 배우들이 실제 어떤 옷을 입는지 알 수가 없었다”며 “파파라치 사진은 평범한 옷을 세련되게 입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말했다. 주부 송보람(29) 씨도 “치마나 구두, 모자 등 특정 아이템만 예쁜 게 아니고 전체적인 모습이 조화를 잘 이루고 있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쁘다”고 말했다.

스타일리스트 한연구(32) 씨는 “파파라치 사진에 나오는 스타들의 옷은 명품도 있지만 길거리 매장에서 산 옷들도 있다”며 “결코 비싸지 않은 옷으로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것을 보고 여성들이 호감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파파라치 룩은 여성들이 지불 가능한 범위의 디자인이기도 하다. 어떤 브랜드를 입느냐, 얼마짜리를 들었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분위기와 세련미다. 이 때문에 스타일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워 준다. 샤넬의 창업자인 가브리엘 코코 샤넬은 “유행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고 말했다. 멋을 표현하는 것은 결국 스타일이란 뜻이다.

○ ‘동대문 디자이너’와 재단사 선생님의 합작품

파파라치 룩이 유행할 수 있는 밑바탕에는 ‘패스트 패션(fast fashion)’이 있다.

‘패스트 푸드’에서 유래한 ‘패스트 패션’은 빠르게 변화하는 유행에 맞추어 저가의 옷을 사서 한두 달 혹은 한 시즌 입은 뒤에는 그냥 옷장에 처박아 두는 경향을 말한다. 인터넷 쇼핑몰의 저가 상품 공세와 빠르게 변하는 고객의 취향이 맞아떨어진 결과 탄생한 것이 패스트 패션이다.

패스트 패션의 핵심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낮은 원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디자인비 절감. 디자이너를 고용해서는 수지타산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대안이 된 것이 할리우드 스타들의 일상을 담은 파파라치 컷이다.

일반인들이 파파라치 컷을 보고 ‘이렇게 예쁠 수가. 도대체 어디서 산거지?’라고 감탄할 때 한번 만들어 봐야지 하고 욕심을 내는 사람들이 있다. 동대문 상가의 도매상에 소속된 디자이너들이다. ‘동대문 디자이너’로 불리는 이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의상학과를 갓 졸업했거나 복장 학원을 수료한 초보 디자이너들로 100만 원 안팎의 월급을 받는다. 이들이 하는 일은 파파라치 컷을 보고 건축물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옷본’을 만들어 재단사들에게 넘기는 것이다.

동대문 시장에서 ‘선생님’으로 불리는 재단사들은 파파라치 컷과 옷본을 번갈아 보면서 할리우드 스타들이 입었던 옷과 거의 비슷한 파파라치 룩을 만들어 낸다. 봉제부터 시작해 10여 년 경력을 갖춘 재단사들이 이 옷들을 대량 생산해 낸다.

25년째 동대문에서 일하고 있는 이한기(47) 재단사는 “파파라치 사진은 옷의 한쪽 면만 보이고 다른 쪽은 안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것만 보고도 비슷하게는 만들 수 있다”며 “우리는 이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 정도는 쉽게 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글=황진영 기자 buddy@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사진=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 파파라치 룩 구입하려면▼

기성복 메이커 셔츠 제품 10만원대… 동대문 도매시장선 2만∼3만원

동대문 도소매시장, 인터넷 쇼핑몰에서부터 기성복 브랜드까지 할리우드 배우 스타일이라고 표방한 아이템이 많이 나와 있어 선택의 폭이 넓은 편이다.

케이트 모스 스타일의 기본인 화이트 셔츠와 모노톤의 면 티셔츠는 꼼뜨아데 꼬또니에, 시스템, 나인식스 뉴욕 등 기성복 메이커에서 10만 원대에 구입할 수 있다.

동대문 디자이너클럽 등의 도매시장을 이용하면 좀 더 싸게 살 수 있다. 일반 소매 손님들에게는 팔지 않지만 큼직한 가방을 들고 가면 소매상으로 보여 구입할 수 있다. 이 경우 입어 볼 수도 없고 만지작거리기가 힘들다는 게 단점이다. 몇몇 가게에서는 ‘하나 사고 싶다’고 솔직히 이야기하면 도매가에 3000원가량을 얹어 팔기도 한다. 2만∼3만 원대에 살 수 있다.

미니 드레스나 조끼, 니트 가디건 등은 질 스튜어트, 바네사 브루노, 마크 제이콥스 등의 수입 브랜드부터 시슬리, 오즈세컨, 시스템 등의 내셔널 브랜드까지 선택의 폭이 넓다.

기본 스타일에 속하는 옷은 다소 돈을 들이더라도 고급 소재로 된 것을 사면 향후 5년은 거뜬히 입을 수 있다. 슬리브리스 스타일의 미니 원피스의 경우 기성복 브랜드에선 10만∼20만 원대, 동대문과 인터넷 쇼핑몰에선 5만∼8만 원대다.

올가을 여러 곳에서 출시된 케이트 모스 스타일의 검은 조끼는 나인식스 뉴욕, 모그 등 브랜드 제품은 10만∼20만 원대다. 인터넷 쇼핑몰 사이트를 이용하면 조금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트렌디한 파파라치 룩을 파는 폴샵, 앤디몰, 레미떼 등의 사이트에서 3만∼4만 원대에 구입할 수 있다. 옥션이나 G마켓에서는 1만 원대 상품을 살 수 있지만 품질이 다소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