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중국을 방문한 뒤 한국은 제쳐 놓고 일본으로 날아갔다. 2박 3일 동안 중국에 머물며 후진타오 국가주석, 원자바오 총리 등을 두루 만난 메르켈은 일본에서도 역시 2박 3일을 보내며 아베 신조 총리 등과 양국 현안을 논의했다. 10여 일 전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진 일이다. 독일 총리이자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 의장인 메르켈의 관심 대상에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여 있는 한국은 쏙 빠졌다. 그의 ‘극동 순방’은 25명의 독일 기업인이 동행할 정도로 큰 규모였다. 메르켈이 난징에서 도쿄로, 오사카에서 베를린으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한국 땅을 내려다보기나 했는지 궁금하다.
한국 외면한 메르켈과 사르코지
요즘 세계적으로 가장 각광받는 지도자는 메르켈과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다. 한국인들도 두 사람의 리더십을 주목하고 있다. 유럽의 사진기자들이 엊그제 우산 속 데이트를 하는 연인처럼 보이는 두 지도자의 모습을 전 세계에 전송한 것도 그들에 대한 큰 관심 때문이다. 메르켈은 이미 세계적 지도자의 지위를 굳혔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그를 2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으로 선정했다. 사르코지는 취임 100일을 겨우 넘겼지만 폭발적 에너지로 프랑스를 변화시키고 있다. 세계인의 관심은 그의 지도력이 프랑스를 넘어 유럽과 지구촌에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에 집중된다.
메르켈처럼 사르코지의 머릿속에도 한국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르코지는 지난달 27일 엘리제궁에서 열린 프랑스 주재 외국대사 초청 행사에서 중요한 발언을 했다. 그는 “프랑스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에 독일 일본 인도 브라질 그리고 아프리카 대표국을 포함시킬 것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G8을 G13으로 확대하되 후보국은 중국 인도 브라질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이라는 말도 했다. 조일환 프랑스 주재 대사는 사르코지의 연설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르코지와 메르켈의 팀워크를 생각하면 그냥 해본 소리가 아니다. 메르켈은 6월 독일에서 열린 G8 정상회의에 중국 인도 브라질 멕시코 남아공 대표를 초청해 G8 정상들과 합동회의를 하도록 주선했다. 한국이 빠진 G13 출범 작업은 오래전에 시작됐다. 프랑스와 독일이 손잡고 추진하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확대도 희망사항 차원을 넘어선 것 같다.
한국은 세계적 관점에서 보면 중국이나 일본만큼 비중 있는 나라도 아니고, 동북아시아를 대표할 만한 나라도 못 된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질식할지도 모른다며 ‘경제적 샌드위치’만 걱정할 게 아니라 ‘외교적 샌드위치’도 함께 고민해야 할 처지다. 역사상 가장 많은 해외순방과 정상회담을 했다고 자랑하는 노무현 대통령 정부가 직면한 현실이다.
노 대통령은 54개국을 다녔건만
노 대통령은 취임 이후 54개국(동일 국가 중복 방문 포함)을 방문했다. 임기가 5개월 남았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37개국)과 김영삼 전 대통령(28개국)의 방문기록을 훌쩍 넘어섰다. 정상외교에 들어간 수백억 원의 예산과 국가적 노력을 탓하자는 게 아니다. 정상외교의 생산성을 따져 보자는 것이다.
아무리 ‘동북아 균형자’라는 좋은 말로 포장하려 해도 냉혹한 현실은 감출 수 없다. 미국 일본과는 멀어지고,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강대국은 한국을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선택과 집중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우선순위는 물론 동맹국이다. 노 대통령이 메르켈과 사르코지의 한국관(觀)을 보면서 이제라도 세계 일주가 정상외교의 목표일 수 없음을 깨달았으면 한다. 확대된 유엔 안보리와 G13에 대한민국이 당당히 포함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는 국민의 바람이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