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대우재단빌딩 한국학술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난 김용준 고려대 명예교수가 하나의 잣대로 학문을 제약하거나 비이성의 잣대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홍진환 기자
‘하나의 잣대로 자유를 제약하거나, 잘못된 잣대로 자신의 비합리성을 정당화하는 모든 행위.’
팔순의 노학자는 인터뷰 내내 이런 독선과 부조리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쏟아 냈다. 과학과 종교의 접점 찾기, 후학 양성에 평생을 바친 공로로 인촌상(특별부문)을 받는 김용준(80·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고려대 명예교수는 현안에 대한 비판과 함께 “우리 사회가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창조적 상상력과 이성의 회복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를 10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대우재단빌딩 한국학술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1980년대 초부터 대우재단 자연과학분야 자문위원을 맡아 연구자들을 지원하고 있다. 평생 가장 신났던 일이 지방의 실력 있는 학자를 발굴해 ‘벼락같이’ 불러 연구비를 지원한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이야기는 “학자의 창조적 상상력을 제약하는 학문 풍토”에 대한 비판으로 옮겨갔다.
“대학 교수는 놀아야 합니다.” 그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골프를 치라는 게 아니라 자기 학문으로 놀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야 세계를 바꿀 상상력이 나옵니다. 한국의 대학은 어떻습니까. 학자들이 톱니바퀴 돌아가듯 틀에 박혀 논문을 뽑아냅니다. 이래서야 인류에 기여할 논문이 나오겠습니까?”
김용준 명예교수△1927년 충남 천안 출생 △1952년 서울대 화학공학과 졸업 △1957년 서울대 대학원 고분자화학 석사 △1965년 미국 텍사스A&M대 대학원 이학박사 △1965∼1993년 고려대 공대 화학공학과 교수 △1970∼1972년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 회장 △1975∼1979년 1차 해직 △1980∼1984년 2차 해직 △1989년∼ 씨알의 소리 발행인 △1999년∼ 한국학술협의회 이사장 △2002년∼ 서울디지털대 석좌교수 △저서: ‘과학인의 역사의식’(1986년) ‘현대과학의 윤리’(1988년) ‘현대과학의 제문제’(공저·1991년)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2005년) ‘내가 본 함석헌’(2006년) 등
그가 다시 물었다. “아인슈타인이 평생 논문을 몇 편 발표했을까요?” 기자가 말할 새도 없이 그의 ‘발언’은 이어졌다.
“16편입니다. 우리 잣대로는 어느 대학에도 취직하지 못할 논문 수죠. 우리는 논문 수라는 잣대로만 학자를 평가합니다. 학자의 열정은 계량화된 평가에 짓눌려 버립니다.”
결국 국내 학계는 논문이 유명 저널에 실리는 데 집착한다. 김 교수는 “‘네이처’에 매주 10여 편의 논문이 실리는데, 그곳에 논문 한 편 실렸다고 인류의 내일을 바꿀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게 정상인가”라고 되물었다.
그에 따르면 이런 구조적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은 정부다. “정부가 하나의 잣대로 대학을 평가하고 간섭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입시부터 대학 운영까지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니 학자들은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것이죠.”
김 교수는 또 비합리적인 잣대로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일부 개신교계도 비판했다. 그는 본래 모태신앙의 기독교인이나 1948년 함석헌 선생을 만난 뒤 ‘과학 없는 종교는 미신에 불과하고, 종교 없는 과학은 흉기’라는 신념을 평생 간직해 왔다. 이런 믿음에서 나오는 비판의 날은 무척 매서웠다.
그는 “개신교는 인간 삶의 존엄성, 양심, 과학적 사고방식, 이성을 다 포기해 버렸다”며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도 사찰의 대웅전에서 예배하는 것과 다름없는 비상식적 행위의 결과”라고 말했다.
“저도 원로 장로지만 큰 교회가 1주일에 거둬들이는 어마어마한 돈을 어디에 쓰는지 모릅니다. 하버드대나 예일대는 미국 개신교가 세운 세계적 대학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세계적으로 뽐낼 대학 하나 못 만들었어요. 맹목적 교세 확장에만 몰두한 결과지요.”
특히 이 대목에서 그는 에둘러 말하지 않았다. “장사가 잘되니까, 돈이 잘 벌리니까 교세 확장에 몰두한 겁니다. 우리 교회는 물신주의에 빠져 버렸습니다.”
그는 “개신교계가 이대로 가면 파탄 날 것이라는 절박함이 든다”며 “리처드 도킨스처럼 무신론자를 표방하는 과학자들의 말에서 오히려 진정한 복음의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개신교에 대한 비판은 올해 작고한 철학자 리처드 로티 스탠퍼드대 교수의 말로 이어졌다.
“로티는 자타공인 무신론잡니다. 그런 그가 말했습니다. ‘예수 부활과 빈 무덤이 실제인지 아닌지로 논쟁하는 게 중요한가, 사도 바울이 코린토스 지방 형편을 조사하여 기독교의 사랑을 알리기 위해 편지를 쓴 것이 중요한가’라고요.”
김 교수는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정부 시절 두 차례 해직됐다. 청와대에 진출한 386 중에 그의 제자도 많다.
김 교수는 이들에 대해 “현 집권층은 반대하는 이들을 모두 적으로 몰고 있다”며 “독재정권 시절의 청와대를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석 달 뒤면 전임 대통령이 될 사람이 아직도 남 탓을 하며, 선거운동 하듯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대통령과 집권층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그들만의 정의’를 비판하는 사람이 모두 나쁘다는 편집증에 빠져 있는 듯해요.”
그는 대통령의 언론관도 이런 인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언론은 사회의 균형을 잡아 준다는 점에서 자유를 보장해야 합니다. 대통령은 마치 (특정 언론이) 망했으면 좋겠는데, 안 망해 약이 오른 것처럼 언론을 대하고 있습니다. 진보신문까지 적대시하고 있어요.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을 비판하면 모두 잘못됐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지요.”
인터뷰를 시작한 지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노학자의 목소리에선 힘이 느껴졌고, 비판의 날은 여전했다. 그에게 21세기 지식인상은 어떠해야 하냐고 물었다. 명료했다.
“획일적 잣대와 비이성을 극복해 사회의 목탁이 되는 것이 젊은 지식인의 책무입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