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남쪽으로 5시간 거리에 있는 구차는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산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작은 산골마을이다.
인근 도시인 차차크에서 매 시간에 한 번씩 구차로 떠나는 버스가 있는데, 이 버스를 탈 때부터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머리에 보자기를 쓰고 고추자루를 인 할머니부터 모서리가
부서진 낡은 아코디언을 멘 술 취한 아저씨, 혁명의 메시지가 담긴 동유럽 특유의 노래를 합창하는 젊은 배낭여행객까지 하나 같이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축제는 구차를 향하는 버스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듯했다.
올해로 47년째 이어오는 세르비아의 트럼펫 축제는 매년 8월 둘째 주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닷새 동안 열리는데 세계에서 오직 하나뿐인 트럼펫 축제다.》
○ 인구 1000명 마을에 매년 관광객 50만 명 몰려
차가운 금관악기들의 중저음을 떠올린 내게 구차의 트럼펫 축제는 도착 첫날부터 ‘사람 냄새 나는 축제가 진짜 축제’임을 깨닫게 해 줬다(가끔 친구들과 야유회를 갔다가 현지에서 만난 다른 그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목청껏 ‘남행열차’를 합창하던 기억이 있는데, 구차 트럼펫 축제는 이곳을 찾은 유럽 젊은이들에게는 꼭 그런 기회처럼 보였다).
유럽의 각지에서 구차로 모여든 트럼퍼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연주 실력을 뽐내듯 온 거리가 들썩거리도록 경쾌한 음악을 선보였다. 이 작은 마을에서 한 집 건너마다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펼쳐졌으니 그 흥겨움과 떠들썩함은 설명이 필요 없겠다. 어린아이부터 노인, 주민부터 행락객까지 너 나 할 것 없이 트럼펫 모양으로 생긴 장난감을 입에 물고 삑삑 소리를 내며 거리를 활보했다. 특히 구차 트럼펫 축제를 기념해 만들어졌다는 구차 맥주는 그 맛이 아주 일품이었는데, 거리에 나온 사람들이 한 손엔 장난감 트럼펫을, 다른 한 손엔 구차 맥주를 들고 다녔다.
오전 10시쯤부터 하나둘씩 등장하기 시작한 트럼펫 오케스트라들은 오후 9시가 되면 50여 개 팀으로 늘어나며 절정에 이른다. 이들의 절반은 세르비아 남부와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인근 국가에서 찾아온 집시 트럼퍼들로, 아름다운 외모와 뛰어난 춤 솜씨를 자랑하는 집시 여인은 이 축제의 또 다른 볼거리였다.
놀랍게도 인구 1000여 명에 불과한 이 작은 산골마을의 트럼펫 축제를 찾는 관광객은 매년 50만∼60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곳엔 번듯한 공연장 하나 없다. 47년째 성황리에 축제를 열어오지만 무대라고 할 만한 건 마을회관 입구에 만들어 놓은 강단뿐이었다. 그 대신 이곳에선 트럼펫을 향해 손을 흔드는 군중 앞이라면 어디든지 공연장이 됐다. 사람들이 공연장을 찾는 것이 아니고 공연이 사람 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이랄까. 그러니 구차 트럼펫 축제에는 돈이 필요 없었다.
○ 축제기간 벌판에 펼쳐진 알록달록 텐트촌 진풍경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축제기간에만 볼 수 있는 텐트족이었다. 이 작은 산골 마을에 수십만 명을 수용할 숙박시설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래서 축제가 열리는 닷새 동안 구차의 모든 가정집 앞마당과 산비탈, 주차장, 들꽃이 피어 있는 벌판 어디든지 알록달록한 텐트촌이 들어선다. 배낭여행객들이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텐트만 있으면 구차 트럼펫 축제에선 숙박도 무료인 셈이었다. 공연도 무료, 숙박도 무료. 이곳에서 필요한 건 오직 삶을 한껏 즐기려는 열린 마음뿐이었다.
베를린에서 27시간 버스를 타고 왔다는 니콜라스 워너라는 청년은 “버스 타는 시간이 좀 길긴 하지만, 새로운 친구도 만나고 멋진 트럼펫 연주도 즐길 수 있으니 돈 없는 젊은이들에게 그쯤은 별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잊지 못할 재미있는 추억도 생겼다. 산골마을까지 찾아온 동양여자에 대한 관심이 가히 폭발적이어서 그냥 거리를 지나가기만 해도 사진 찍기를 요청했고, 손을 흔드는 현지 젊은이에게 답례로 가볍게 웃어주면 괴성을 지르며 뒤로 쓰러지는 시늉까지 했다. 프랑스, 독일, 슬로베니아 등 인근 국가에서 온 취재진의 인터뷰 경쟁이 엉뚱하게 동양인인 나에게 몰리기도 했다. 다음 날 아침 현지 신문과 방송에 내 인터뷰가 크게 나오자 내가 묵던 집 주인아주머니가 새벽부터 내 방으로 달려오기도 했다.
세르비아는 오랜 전쟁의 그림자에 가려진, 가난하고 초라한 곳일 거라는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작은 산골마을에서 수십 년간 열려온 트럼펫 축제를 지켜보면서 과연 문화생활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문화생활은 꼭 비싼 돈 주고 공연장에 자주 갈 필요도, 주차시설 잘 갖춰진 공연장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축제에 얼마나 많은 전문가들이 합세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불현듯 한국의 수많은 부실 축제들, 화려한 공연장, 그리고 빈 객석들을 떠올리며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지기도 했다.
술자리에서 알게 된 세르비아인 친구 이반이 자랑스럽게 떠들던 말이 귓가를 계속 맴돈다. “올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한 가수가 세르비아 사람이야! 참 대단하지! 그런데 우린 그녀를 이 축제에 초대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이 축제의 주인공은 바로 트럼펫 오직 하나거든!”
유경숙 공연기획자 prniki1220@hotmail.com
▼고란의 콘서트, 열광의 소나기를 만나다▼
올해 트럼펫 축제에선 금요일 밤을 놓치지 말라던 현지인의 충고는 정확했다. 에밀 쿠스트리차 감독의 영화 ‘언더그라운드’와 한국 영화 ‘작업의 정석’ ‘싱글즈’ 등의 영화음악과 각종 CF로도 잘 알려진 세계적인 뮤지션 고란 브레고비치가 자신의 밴드를 이끌고 축제를 찾아왔기 때문이다.
구차 주민들은 해외 공연으로 늘 바쁜 와중에도 그가 기꺼이 구차까지 찾아온 것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는데 공연장(?)인 운동장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구름떼처럼 몰려든 인파로 공연은 두 시간이나 지연돼 오후 11시에나 시작됐다. 이 콘서트에는 무려 80만 명이 넘게 모였다고 했다.
어렵사리 시작된 고란 브레고비치의 트럼펫 콘서트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관중들은 끊임없이 괴성을 질러댔고 흥분을 이기지 못한 젊은이들은 들고 있던 맥주를 머리에 붓기도 했다.
분위기가 한참 달아올랐을 때 예고에 없던 소나기가 몰아쳤는데, 이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운동장에서 유일하게 비를 피할 수 있던 곳은 콘서트를 위해 설치된 임시 무대뿐이었는데, 무대 위에 앉아서 연주하던 고란 브레고비치는 비를 맞고 있는 관중에게 미안했던지 갑자기 벌떡 일어나 괴성을 지르더니 점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80만 명의 관중들은 답례라도 하듯 빗속에서 일제히 쿵쿵 발을 구르며 다 함께 제자리에서 뛰기 시작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관중의 그 열띤 함성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