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프랭크 리치는 2000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직원 모니카 르윈스키의 스캔들 이후 르윈스키를 인터뷰해 이렇게 썼다.
‘르윈스키는 언론에서 만들어 낸 이미지와 거의 닮은 점이 없었다. 그녀는 언론이 과거의 정치적 섹스 스캔들 주인공들과 정확히 일치하는 사람으로 그려 내기 위해 때로 부정확한 사실을, 심지어 노골적인 거짓말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말했다.(중략) 르윈스키는 사건이 터지고 나서 전에 알던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는 경험을 했다.(중략) 그녀는 포위를 당한 도시에서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친 생존자처럼 보였다.’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면서 화제를 낳고 있는 ‘가짜 박사’ 신정아 씨. 그녀와 변양균 전 대통령정책실장의 관계에 대한 얘기 끝에 부부싸움까지 하는 가정도 많다. 두 달 전 미국으로 출국할 때 운동모자와 티셔츠 차림, 이번에 갑자기 귀국할 때의 청바지와 티셔츠 운동화 차림의 신 씨는 칼럼니스트 리치가 표현한 ‘목숨만 건져 도망친 생존자’의 모습을 닮았다는 느낌을 줬다.
그러나 르윈스키 사건은 스캔들 외에 클린턴의 거짓말이 문제된 데 비해 신 씨 사건은 스캔들과 권력형 비리 의혹의 상관관계가 본질이라는 점에서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도 이런 스캔들이 터질 때마다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부분은 있다.
‘부적절한 관계’란 표현은 클린턴 대통령이 자신의 스캔들을 시인하면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재미 로비스트 린다 김 사건 수사 때도 검찰은 1996년 당시 국방부 장관과 그녀의 관계를 ‘부적절한 관계’로 표현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편지 내용도 공개했다. 이번 사건도 신-변 두 사람의 내밀한 사적(私的) 관계가 주로 사람들의 뇌리를 파고드는 이상한 흐름을 보인다. 자칫하면 수사가 태산명동(泰山鳴動)에 서일필(鼠一匹)꼴이 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그 발단은 검찰 자신이 제공했다고 본다. 국민의 관심도가 워낙 높기 때문인지 두서없이 허둥지둥 수사하는 모양이 도대체 미덥지 않다. 그동안 검찰이 해 놓은 것이라곤 신-변 두 사람이 주고받았다는 e메일 수백 통을 입수 분석한 것밖에 별다른 결과물이 없다. 대중의 쓸데없는 호기심만 자극해 놓았을 뿐이다. 신 씨에 대한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은 검찰의 자업자득인 측면도 있다.
검찰이 두 사람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말해 줄 수 없다”고 한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여러 수사 관계자가 “부적절한 관계”라는 애매한 표현도 모자라 “입에 옮기지 못할 내용” “노골적 내용”이라고 귀띔해 잔뜩 호기심을 일으킨 것은 무책임하다. 어떤 관계자는 “린다 김의 연서(戀書)보다 훨씬 강렬한 내용도 있다”고 했다. 어느 신문엔 신 씨의 나체사진이라며 신체 일부를 모자이크 처리한 사진도 실렸다. 사진의 진위(眞僞)보다 그것을 실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느냐 하는 점이 중요하다.
지금 ‘린다 김 사건’ 하면 많은 사람이 ‘백두사업’을 둘러싼 불법 로비 의혹 사건이었다는 핵심 사실은 잊은 채 국방부 장관과 린다 김의 스캔들로만 기억하고 있다. 이번 사건도 그렇게 안 되리라는 보장이 없다. 권력형 비리 의혹을 규명하는 데 주력하되 개인의 인격과 사생활은 침해하지 말 일이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