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고산초교 어린이들이 이 학교의 명물 수길도서관에서 독서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다. 도서관을 즐거운 놀이터로 바꾼 ‘위대한 아빠’ 위종덕 씨, 김현주 학교운영위원회 회장, 김재식 교장이 아이들과 함께했다. 제주=김재명 기자
《잘도 반갑수다게(매우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는 제주 고산초등학교(제주시 한경면 고산리)가 자랑하는 수길도서관입니다. 제가 이렇게 나선 것은 ‘작은 도서관’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꿈과 땀이 배어 있는지 소개하기 위해서랍니다.》
제주공항에서 순환도로(12번국도)를 따라 서남쪽으로 1시간쯤 가면 한라산이 살포시 벗어 놓은 비단치마처럼 넓게 펼쳐지는 ‘진드르’(평야의 제주 사투리)를 만나시게 될 거예요. 제주의 명물 감귤은 물론 마늘 감자 양파 양배추 브로콜리에 쌀까지 재배되는 넓은 농토와 어장을 함께 갖춘 고산리랍니다.
인구 3000여 명의 고산리에는 두 가지 명물이 있어요. 독수리가 내려앉은 듯한 형태의 바위섬 등 해안 절경과 희귀 동식물의 서식지여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차서도와 고산기상대가 자리 잡은 수월봉이랍니다.
그런 절경 속에 자리 잡은 제가 탄생하는 데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숨어 있어요. 고산초교 10회 졸업생으로 수재로 소문났던 김수길 씨가 일본 메이지(明治)대 박사 과정을 밟던 중 불의의 교통사고로 요절하자 그 아버지가 아들의 모교 후배들이 아들이 못다 이룬 꿈을 이뤄 주기 바란다며 세워 주셨거든요. 그게 1979년이니까 제 나이가 벌써 28세네요.
고산초교는 이 마을 유일의 초등학교라서 주민 대부분이 이곳을 거쳐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1980년 이후에 입학한 분은 모두 저를 통해 책과 친해졌지요.
당시만 해도 시골마을 학교에 별도의 도서관이 있는 경우는 드물어 전 귀한 대접을 받았어요. 학생들은 일주일에 한두 차례 꼭 정해진 시간에만 저를 만날 수 있었고, 책을 밖으로 가져가 읽을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저를 만나러 올 때마다 엄숙한 표정을 지어야 했고 발뒤꿈치도 들고 걸어야할 만큼 어려워했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천덕꾸러기로 전락했어요. 학생들이 저를 어려워하면서 아이들의 발길이 끊겨 버린 공간으로 있을 때가 많았고 학교에선 빈 공간을 각종 대회의 우승 트로피 보관소와 교사들의 자료실로 쓰기 시작했거든요. 게다가 예산이 부족해 소장 도서를 새 책으로 바꿔 주지 못해 곰팡내 나는 공간이 돼 버렸답니다.
그런 저를 이번 여름에 부활시켜 주신 분들이 계세요. 김재식(55) 교장선생님, 김현주(39) 학교운영위원회장, 그리고 ‘위대한 아빠’ 로 불리는 위종덕(37) 씨랍니다.
교장선생님은 지난해 9월 마을 주민들의 초빙으로 부임하신 뒤 저를 발견하시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마을도서관이었고 하버드대 졸업장 보다 소중한 것은 독서하는 습관”이라 했던 빌 게이츠의 말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으셨대요. 하지만 저를 되살리기에는 예산이 빠듯해 고민에 빠졌죠.
그때 구원투수로 나선 분이 고산성당 사무장 위종덕 씨였어요. 다섯 살배기 아들 대한이를 둔 그는 마을에선 ‘위대한 아빠’로 더 유명한 분인데요. 갓난아기 시절부터 대한이에게 끊임없이 책을 읽어 줬더니 두 돌이 되자 한글을 깨치고 지금까지 1000여 권을 독파했다고 하네요. 이때부터 위대한 아빠는 “독서만큼 좋은 사교육은 없다”며 올해 5월 독서유아교육모임인 푸름이닷컴을 통해 소개받은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좋은 책읽기 가족 모임)에서 3000권의 책을 지원받기로 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약속한 개관일(6월 25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였어요. 교장선생님은 4학년 혜성이 아빠이자 학교운영위원회장인 김현주 씨에게 SOS를 쳤어요. 혜성이 아빠는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주민을 설득해 목재와 목공장비를 마련하고 밤샘 작업으로 벽면을 새로 단장했어요. 아이들의 학교 선배이자 엄마 아빠이기도 한 주민들은 힘을 합쳐 마루를 놓아 아이들이 누워서도 책을 읽을 수 있게 했고 어른 키 높이의 서가를 톱으로 썰어내 어린이용으로 눈높이를 맞춘 뒤 바퀴도 달아 줬어요.
방학을 맞아 고향에 와 있던 여대생은 호랑이와 토끼가 뛰어 노는 아크릴 벽화를 그려 줬고 손재주가 좋은 ‘위대한 아빠’는 4명이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독서그네를 2개나 만들어 주셨답니다.
선생님들은 교장실과 교무실에 배정된 에어컨 2대를 제게 양보해 주셨어요. 덕분에 올 여름방학 내내 저는 부모님 고향에 놀러 왔던 서울 친구도 부러워하는 아이들의 친근한 놀이터로 변했답니다.
쉿,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요. 덕분에 선생님들의 고민이 하나 늘었대요. 제가 재탄생한 지 100일밖에 안 됐는데 전교생에 독서 바람이 불어 수업시간에도 책을 읽는 친구까지 생겼다고. 그렇지만 “들과 산, 바다를 모두 끼고 있어 절로 살아 있는 교육이 이뤄지는 우리 마을에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책만 있다면 강남특구도 안 부럽다”는 수길도서관 삼총사의 믿음은 차서도만큼 아름답고 수월봉만큼 높답니다.
제주=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