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4시 40분경. 풍경과 목탁 소리가 울렸다.
맑은 쇳소리와 둔탁한 나무 소리가 조화를 이뤄 산사의 맑은 기운을 가슴 속으로 날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건 불빛 속의 날벌레들뿐이다.
창 너머 석탑이 시간과 공간을 붙들었다. 시침이 얼어붙은 듯했다.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몸을 차가운 새벽 공기가 휘감았다.
석탑 위로 둥그런 그림자가 비쳤다.
이 그림자가 움직이는 걸 보니 사람인가 보다.
무엇이 그를 석탑 앞에 웅크리게 만들었을까.
내가 만나지 못했던 시간. 일상 속의 나는 이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나.
오전 5시 10분.
칠흑 같은 어둠에 숨어 있던 청량산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움직이는 건 없었다. 눈을 감아 보았다.
새벽 공기가 귀를 스치고 볼을 돌아 코앞으로 바투 다가섰다.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고 있는 몸으로 들어오는 새벽 공기를 더욱 신선하게 느껴졌다.
‘무념무상(無念無想)’.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단어지만 막상 다가가기란 쉽지 않다.
적막한 가운데 우연한 움직임. 그에 맞춰 출렁이는, 나를 감싸고 있던 새벽 공기. 문득 떠오르는 깨달음.
‘아, 내가 움직이면 나를 감싼 주변이 그에 맞춰 움직이는구나!’
가만히 있었다면 풍경 속 작은 소품에 머물렀을 나는 주인공이 되었다.
풍경 속에 머물지 않을 힘은 내가 가지고 있구나.
거대한 사회의 틀 속에서 ‘남의 시간’에 휩쓸려 지내다가 비로소 나를 되찾았다.
청량사의 심검당(尋劍堂·지혜의 칼을 찾는 집)에서였다.》
동떨어진 고택, 외진 길에서 ‘참 나’를 찾다
여름의 흥분과 추석의 들뜬 분위기가 수그러든 요즘은 사색의 공간을 찾기 좋을 때다. 이틀만 지나면 달력은 한 해의 끝을 향해 달리는 10월로 얼굴을 바꾼다.
사람이 많지 않은 곳,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 산골이라 가을을 빨리 맞는 사색의 여행지 경북 봉화를 찾았다. 예로부터 봉화는 그 ‘동떨어짐’으로 인해 서울을 떠난 선비들이 즐겨 터를 잡았던 곳이다.
○ 나를 돌아보게 하는 청량사
▲ 촬영·편집 : 박영대 기자
“법당 안과 석탑 앞이 명상 장소로 인기 있고 편이지요.”
명상을 한다면 어떤 장소가 좋겠느냐고 묻자 청량사 석지현 주지스님은 이렇게 일러 줬다. 이어 “자신을 찾는 데는 시간과 장소를 따질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루 일을 끝내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 5분만 자신을 돌아봐도 마음이 흔들리는 횟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있으면 명상 시간이 20분, 30분으로 점차 늘어나리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청량사는 청량산도립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다른 절과 달리 바위산의 아주 가파른 비탈에 터를 잡았다. 절을 감싸 안은 바위산 봉우리들은 절경이다. 절의 초입에는 자그마한 찻집이 있어 운치를 더한다.
매년 이맘때면 가을밤을 즐길 수 있는 ‘산사 음악회’가 열린다. 올해는 국악인 장사익 씨를 초청해 10월 6일 오후 7시 ‘별빛 나들이’라는 주제로 갖는다. 음악회가 있을 때면 경내의 비탈길 전체가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사람들로 가득 찬다.
절에는 방이 몇 개 있지만 수양하는 사람들에게만 개방한다. 청량사 054-672-1446
○ 마음이 푸근해지는 만산고택
▲ 촬영·편집 : 박영대 기자
청량사에서 국도 35호선을 따라 춘양면으로 가면 1878년(고종 15년)에 지어진 만산고택(晩山古宅)을 만난다. 아직도 사람이 생활하는 ‘살아 있는’ 집이다. 강백기(62) 씨가 5대째 살고 있다.
춘양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이 집은 조선시대 가옥 양식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유명하다. 부근에는 이런 고택과 정자(亭子)가 많아 예스러운 분위기를 만끽하기에 적당하다.
봉화는 조선시대 병자호란의 치욕을 참지 못하고 서울을 떠난 다섯 명의 선비(태백오현)가 함께 터를 잡고 교류한 곳이기도 하다. 그 후손들은 태백오현이 만나던 정자 ‘와선정’의 이름을 딴 ‘와선정계’를 결성해 만남을 이어 가고 있다.
만산고택의 긴 행랑채 사이에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널찍한 마당을 만난다. 오른쪽에는 별도의 담으로 둘러싸인 별당인 ‘칠류헌(七柳軒)’이, 왼쪽에는 서실이 있다. 3칸의 방과 큰 대청마루가 있는 칠류헌은 고택에서 자고 싶어 하는 외지인에게 공개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예술인을 비롯해 고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자주 다녀간다.
봉화는 아직도 순박한 정감이 넘치는 곳이다. 송이가 한창인 9월 말과 10월 초에 봉화를 찾는다면 분식집 라면 속에서도 자연송이를 만날 수도 있다. 물론 라면 값만 받는다. 상품가치가 떨어져 팔지 않고 식구들이 먹으려고 둔 송이를 ‘외지에서 온 손님이 맛이라도 보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며 함께 썰어 내는 그런 동네다.
강 씨 부부도 대지 400평의 칠류헌을 손님에게 내주기도 한다. 방이 3개나 있어 2, 3가족이 함께 묵을 수도 있다. 고택 관리비를 벌충하기 위해 10만 원의 숙박비를 받는다. 이들 부부는 돈을 받을 때마다 멋쩍어 한다. 웬만한 펜션의 숙박비도 그보다 비싼데 말이다. 054-672-3206
○ 활력을 되찾게 하는 금강송 숲
▲ 촬영·편집 : 박영대 기자
만산고택에서 차를 타고 강원 영월 방향으로 10여 분. 봉화 고랭지 약초시험장을 조금 지나면 유명한 금강송을 만나게 된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일반에 공개된 봉화군 금강송 숲이다. 숲에 들어서면 60∼80년 된 잘 뻗은 금강송이 내뿜는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금강송은 소나무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매끈하게 잘 뻗어 자란다고 해서 미인송, 표피가 붉은 빛을 띤다고 해서 적송, 나무속이 노랗다고 해서 황장목, 목재의 집산지가 춘양이어서 춘양목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금강송은 스스로 가지를 쳐낸다. 자라면서 아래쪽에 있던 가지들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들고 저절로 떨어져 나가게 만든다. 항상 자신의 주변을 잘 정리하는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금강송 숲에는 후계를 잇기 위한 작업이 한창이다. 간벌을 해서 햇볕을 들이고, 풀을 베어 내 땅에 떨어진 금강송의 씨앗이 자리를 잡으며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5km가량의 산책로를 숲 해설가의 설명을 들으며 걷는 데는 약 1시간이 걸린다. 숲 해설가 이귀매 씨는 “숲의 치유 능력을 믿는 도시인들이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찾아온다”며 웃었다. 아직 개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편의시설은 전혀 없다.
영주국유림관리사무소에 전화하면 숲 해설가의 설명을 들을 수 있다. 054-635-4253
봉화군의 여기저기서 사과나무를 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먹을거리로는 ‘송이돌솥밥’과 ‘한약우’, ‘봉성 돼지숯불구이’가 있다.
봉화군은 마침 29일부터 10월 2일까지 ‘춘양목 송이 축제’를 연다. 춘양목을 이용한 한옥짓기 체험, 송이채취 체험 등의 행사를 즐길 수 있다.
글·봉화=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사진·봉화=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donga.com에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