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가 선택한 세계 속에서 온몸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보얀 알과 멧비둘기 부부의 극진한 고요 앞에 합장했네 지상의 새들이 날 수 있다는 건 자기 선택에 대한 최선일 뿐 모든 새가 날아야 하는 건 아니지 않나―‘어떤 출산’ 중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지독한 깨달음의 노래
내게 시를 읽는 일은 늙은 어머니의 몸을 주무르는 일과 같다. 어머니의 입에서 나직이 흘러나오는 “얘야, 아프구나, 살살 좀 주무르거라” 소리를 통해 나는 화들짝 모국어를 회복하고 다시금 글쓰기에 접근할 수 있다. 듣는 이가 없더라도 모국어의 목청은 늘 간절하고 간곡하다.
영혼의 문법인 모국어를 탐하는 자를 우리는 시인이라 부른다. 또한 그가 목청껏 쏟아 놓은 소리를 우리는 시라고 부른다. 난데없이 마당에 떨어진 편지 꾸러미를 뜯어서 읽어 보듯, 김선우의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를 읽는다. 그의 시는 여전히 독하고 비리고 환하다. 그의 시가 독하다 함은 오래된 쇠북처럼 내부의 소리를 쉽게 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사랑에 값하는 기나긴 응시의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비린 온몸을 열어 묵직하고도 환한 소리를 들려준다.
표제작인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를 본다.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그대가 피는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시인은 오직 응시를 통해서만 사랑을 완성한다. 그것은 경도와 위도가 겹치는 혼자만의 어느 절대적인 지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시 ‘아욱국’에서 시인은 아욱의 푸른 독을 치대어 빨아야만 마침내 뜨거운 국으로 화하는 힘겨운 자기 정화의 과정을 보여 준다. ‘치댈수록 깊어지는/이글거리는 풀잎의 뼈/오르가슴의 힘으로 한 상 그득한 풀밭을 차리고/슬픔이 커서 등이 넓어진 내 연인과/어린것들 불러 모아 살진 살점 떠먹이는/아욱국 끓는 저녁이네 오, 가슴 환한.’
그의 시에 정화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선은 감춰진 현실에 깊숙이 칼날을 들이대며, 일본군 위안부의 일생을 긴 서사시로 고발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번 시집은 곳곳에 불교의 향을 피우며 좀 더 단단하고 환한 깨달음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 가령 ‘칠흑 같은 흙 속에 뚜벅뚜벅 박힌 희디흰 무우寺(사), 이쯤 되어야 메아리도 제 몸통을 타고 오지 않겠나’가 그렇다. ‘그렇게 오는 사랑 있네/첫눈에 반하는 불길 같은 거 말고/사귈까 어쩔까 그런 재재한 거 말고/보고 지고 그립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솨아아아아/온몸의 물길이 못 자국 하나 없이 둑방을 넘어’ 오는 사랑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시인의 목청이 우주로 향한다. 이토록 강렬한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언젠가 시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시와 시인이 이토록 하나로 일치할 수 있는가 하고 놀라워했다. 누군가 그를 “살아 있는 몸을 신전으로 하여 뭉클한 생명의 향연을 펼치는 샤먼”이라고 했거니와, 과연 그가 ‘시의 무당’이란 느낌을 좀처럼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윤대녕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