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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홍찬식]오키나와 옥쇄(玉碎)

입력 | 2007-10-02 03:02:00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던 1945년 3월 미군은 오키나와 섬을 1500대의 군함으로 에워쌌다. 동원된 병력만 54만 명에 달했다. 섬 안에 있던 일본군은 11만 명으로 ‘독 안에 든 쥐’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섬 곳곳에 산재한 동굴에 숨어 끈질기게 저항했다. 일본은 미군이 일본 본토에 상륙작전을 펼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오키나와에 미군 병력을 최대한 붙잡아 두며 시간을 벌려 했다. 바둑으로 치면 오키나와는 ‘버리는 돌’이었다.

▷그해 6월 미군이 오키나와를 완전 점령한 뒤 8월 6일 히로시마, 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은 항복했다. 오키나와 결전은 2차 대전의 마지막 전투이자 ‘일본 제국의 종착역’으로 기록된다. 3개월의 짧은 전투에서 오키나와 주민의 4분의 1인 12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의 지연 작전에 총알받이가 된 것이다. 미군 전사자 1만2500명, 일본군 전사자 9만4000명을 합친 것보다 많은 희생이었다. 이들 중에는 미군에 붙잡히기 전에 집단 자결한 민간인 수천 명이 포함돼 있다.

▷일본 제국은 주민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여자는 능욕당하고 남자는 사지가 찢겨 죽는다’며 ‘옥쇄(玉碎·깨끗이 죽음)’를 강요했다. 이른바 군민공사(軍民共死)다. 전투가 끝난 뒤 동굴 속에는 칼과 끈으로 서로 죽인 처참한 시체들이 무더기로 발견됐다. 최근 일본 정부가 새 고교 교과서에 ‘일본군이 집단 자결을 강제했다’는 표현을 삭제하기로 하자 오키나와 주민 10만 명 이상이 분노에 찬 시위를 벌였다. 새 교과서대로라면 주민 스스로 알아서 자결을 택했다는 얘기가 된다.

▷수많은 이가 몸서리쳐 가며 겪은 일을 ‘구체적 증거가 없다’며 부정하는 것은 일본의 전형적인 역사 왜곡 수법이다.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는 2000년 “일본은 적게는 오키나와, 크게는 아시아에 대해 자신들의 짐과 부담을 자각해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당시 오키나와엔 군인 등 한국인이 1만 명이나 동원됐던 만큼 우리도 보고만 있을 심정이 아니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