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0월 2일 오전 4시. 중국 마적단 400여 명이 중국 지린(吉林) 성 훈춘(琿春) 시를 습격했다. 일본 관청과 상가를 공격해 불을 질렀다. 일본인 13명이 죽고 30명이 부상했다.
마적단 토벌을 위해 일본군 19사단이 간도로 즉각 출병했다. 시베리아와 중국 각지의 일본군이 속속 간도로 집결했다. 중국 침략을 위해 관둥저우(關東州)에 주둔했던 관동군까지 간도로 출동했다. 이상했다. 마적단 소탕 규모라고 보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일본군은 사건 며칠 전 습격 정보를 입수하고도 경찰 30여 명과 연락병을 철수시켰다. 10월 1일 마적이 훈춘 부근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도 일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마적에게 납치당했던 일본 상인의 증언에도, 훈춘 일본영사관이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도 조선인 가담 사실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 외무성은 마적 중 불령선인(일제가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르던 말) 100여 명이 포함됐다고 발표했다.
마적단의 우두머리 장장하오(張江好)는 친일 마적이었다. 마적이 일제의 물자 원조를 받았다는 증언도 속속 나왔다. 그런데도 19사단에 하달된 작전 명령은 ‘훈춘 및 간도 지방에서 불령선인 및 거기에 가담한 마적 기타 세력을 초토화한다’였다.
이 작전의 목적은 독립군 제거였다. ‘훈춘사건’은 일본군이 간도의 독립군을 토벌할 구실을 만들기 위해 조작한 것이었다. 당시 독립군은 간도를 거점 삼아 수시로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나들며 일제 주요 기관을 습격했다. 일제에 눈엣가시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그해 6월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을 참패시킨 후 일제는 이를 갈고 있었다.
10월 3일 19사단이 전격 투입된 이후 일본군은 독립군 근거지와 촌락을 모조리 파괴하면서 피의 학살을 시작했다. 이후 석 달간의 대량 살육으로 조선인 37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5000여 명이 체포됐다. 가옥 3300여 채가 불탔다.
조작과 학살이 항일 의지를 꺾진 못했다. ‘훈춘사건’ 20여 일 후 김좌진과 홍범도가 이끄는 독립군 부대가 만주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청산리전투였다. 마침내 1921년 5월 일본군은 중국 지린 성 옌볜(延邊)에서 철수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