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도 안 가고 과외도 안 하지만 도서관만 있으면 다 해결돼요.” 최전방에 있는 강원 화천군 산양초등학교 아이들은 도서관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교육을 받는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효진(김강택 군의 어머니) 김현정(정은주 양의 어머니) 씨, 은주 양, 강택 군. 화천=이훈구 기자
북한의 논밭과 사람들이 다니는 모습이 보이는 승리전망대에서 10km쯤 떨어진 최전방. 인근 군부대만 10여 곳이고 학교 뒤는 민간인 출입통제구역.
그래서 강원 화천군 산양리 산양초등학교에 다니는 100여 명의 전교생은 대부분 군인 자녀다. 아버지의 근무지에 따라 이르면 1년, 늦어도 2년에 한 번은 이사를 하는 경우가 많다.
아침에 창문을 열면 산등성이 사이로 뽀얀 안개가 피어오르고 밤이면 도시 아이들이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별이 가득한 곳. 하지만 패밀리레스토랑도 없고, 학원이라고 해 봐야 보습학원 피아노학원 태권도학원이 하나씩 있을 뿐이다.
교실 하나 크기이지만 지난해 산양초교에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대표 김수연)의 후원으로 ‘마을도서관’이 생긴 것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도시 생활 경험도 있고 교육열도 높은 이 지역의 엄마들에게 도서관은 ‘필수’나 다름없다. 도시 아이들은 학원을 돌지만 이곳 엄마들은 아이들을 도서관에서 책으로 키운다. 그리고 책을 통해 자신의 경험도 넓혀 간다.
○ 책 읽고 난 뒤 딸과의 데이트
지난해 7월 부산에서 이사 온 김현정(40·6학년 정은주 어머니) 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이를 힘들게 하기 싫어 학원을 한 번도 보내지 않았다. 학습지도 한번 시키지 않았다.
사람들은 ‘뭘 믿고 그러느냐’고 하지만 독서광인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책 읽기 습관이 들었고 부산에서 과학영재로 뽑힌 딸을 보면서 그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김 씨는 당초 학교의 마을도서관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러나 은주는 학원을 다니지 않아 오후에 시간이 많이 남았고, 산꼭대기에 있는 군인아파트까지의 하굣길도 걱정됐다. 김 씨는 학교가 파하기 2시간 전쯤 도서관에 나와 책을 읽으며 아이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도서관은 아이와 엄마의 만남의 장소가 됐다.
은주는 수업이 끝난 뒤 도서관으로 엄마를 만나러 와 곁에서 책을 읽는다. 모녀는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어둑해져서야 학교를 나선다. 모녀는 그날 읽은 책을 소재로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만의 ‘산양리 식 독서토론’이다.
“엄마,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쟁이’ 한번 읽어 봐요.”
“은주야. 엄마가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에서 봤는데, 우리도 거기 한 번 가 볼까?”
○ 도서관에서 찾은 삶의 교훈
지난해 말 대전에서 이사 온 김효진 씨는 이 도서관에서 두 아이(5학년 김나연, 3학년 강택)와 함께 겨울방학을 지냈다. 이사 온 다음 날부터 방학이 시작돼 김 씨는 아이들을 적응시키려고 매일 도서관으로 데리고 나왔다. 점심도 도시락으로 해결하며 책을 읽었다.
개학 후에도 김 씨는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가 기다리는 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이왕 시골에 왔으니 귀농과 환경에 관한 책부터 먼저 잡았다. 그러자 김 씨의 일상에 작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들판을 지나가다 자연도감에서 본 풀 하나, 꽃 하나가 새롭게 다가왔다. 내친김에 ‘숲 해설가’ 과정을 공부했고 조그만 텃밭도 가꾸었다. 수확물은 호박 두 개, 가지 하나…. 못생기고 벌레 먹은 농작물이라 해도 손에 쥐었을 때의 그 기쁨은, 자식 농사와 같았다.
김 씨는 아이들에게 독서만 강조하며 학원에도 보내지 않지만 도시에 사는 여동생과 전화만 해도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공산품과 달리 오늘 심은 배추를 내일 당장 수확할 순 없다는 게 그가 농사를 통해 얻은 교훈이다.
김 씨는 “자녀 교육이나 농사는 단 한 가지, ‘기다림’”이라며 “아이들은 끌고 가는 게 아니라 밀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은 아이들이 넓은 세상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 해답이 책 속에 있다는 점을 마을도서관이 그에게 가르쳐 줬다.
화천=채지영 기자 yourca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