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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우 칼럼]평화가 손에 잡혔는가

입력 | 2007-10-05 20:35:00


평양에서 남북 정상이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하고, 베이징에서는 북한 핵시설을 연내에 불능화(不能化)하기로 하는 6자회담 합의문이 발표됐다. 한반도에 평화의 기운이 무르익는 것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아직 평화를 향한 길은 멀고도 험하다는 것이다. 남북 정상은 ‘10·4 선언문’ 1항에서 “남과 북은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통일 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갈 것”이라고 천명했다. 대의(大義)는 옳다. 그러나 현실에는 맞지 않는다. 민족과 자주의 선언된 원칙과 현실 간의 괴리가 깊어지면 평화는 더 멀어질 수 있다.

‘우리 민족끼리’의 허구성

한반도 문제는 민족 문제이자 국제 문제이다. ‘우리 민족끼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이유다. 반세기 이상 지속돼 온 정전(停戰) 체제의 주역이 미국과 중국, 북한이라는 점만으로도 ‘우리 민족끼리’의 허구성은 명백하지 않은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햇볕정책이 한계에 직면한 것도 민족 공조(共助)와 국제 공조 간에 균형감각을 잃었기 때문이다. 평양 정권은 민족 공조를 앞세워 경제적 실리를 꾀하면서도 실질적 긴장 완화에 필요한 군사부문은 조-미(朝-美) 간 문제로 일관해 왔다. ‘10·4 공동선언’에서도 핵 문제와 관련된 언급은 6자회담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남북이 공동 노력하기로 했다는 것뿐이다. 핵 문제는 미국과의 문제라는 평양 정권의 기본 방침은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이라크 수렁’에 빠진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북한 핵 문제를 ‘낮은 수준의 비핵화’, 즉 핵 능력은 있되 무기화하지 않는 선에 묶어 두고 그 이상의 확산이나 핵 물질의 대외 이전을 방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따라서 북한 핵시설의 연내 불능화란 ‘10·3 베이징 합의’가 미국 측으로서는 일정한 성과일 수 있다. 그러나 핵시설의 불능화에서 동결을 거쳐 핵무기의 완전 폐기에 이르는 최종 목표가 언제, 어떻게 이뤄지리라는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핵무기를 수령 체제 유지를 위한 최후 수단으로 여기고 있는 평양 정권이 선뜻 핵을 포기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자칫 사실상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과 남한이 명목상의 평화 체제를 이루는 최악의 상황이 빚어질 수도 있다. 이것만은 막아야 한다. 남북관계가 발전하고 함께 평화 번영을 하자는 것은 좋다.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 원칙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북핵 폐기 없이는 평화 체제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우리 민족끼리’에 매몰돼선 안 된다. 한미동맹을 중심으로 국제 공조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여기에 무슨 친미(親美)-반미(反美), 보수-진보의 이분법적 갈등이 필요한가. 북핵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 생존의 문제다.

남북 정상의 선언이 실행되려면 각론(各論)에 대한 구체적 검토와 국민의 동의(同意)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무엇을 위한 화해 협력인가에 대한 국민적 합의부터 도출해야 한다. 이는 우리 국민이 막대한 부담을 져서라도 도와주면 비정상 국가인 북한이 정상 국가가 되고, 북한 주민의 실제적 삶도 향상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해서 평화 공존과 평화 통일의 확실한 궤도로 진입할 수 있는가, 우리와 우리 자식들이 다시는 전쟁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겠는가에 대한 신뢰의 공감대를 이루는 일이다.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지난 10년간의 햇볕정책은 수단과 목적을 혼동한 데서 실패했다. 햇볕은 북을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 수단인데도 그것이 마치 목적인 양 북이 ‘나쁜 행동’을 거듭해도 지원 외에 대안(代案) 없다는 식의 ‘햇볕 도그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도 노 대통령은 ‘불신(不信)의 벽’을 느꼈다고 했다. “북측은 아직도 남측에 여러 가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측의 햇볕이 결국 그들의 체제를 흔들려 한다는 의심이다. 결국 햇볕으로도 외투는 벗기지 못한 셈이다.

평화가 손에 잡혔는가?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우리 민족끼리’라는 수사(修辭)로 평화를 잡을 수는 없다. 민족이란 감성보다 ‘말 대(對) 말, 행동 대 행동’이란 이성이 우선할 때 진정한 평화가 손에 잡힐 수 있다. 멀고 험한 길이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