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 강릉시 왕산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왕산마을도서관’의 책을 들고 둔지 마을회관의 도마경로당으로 찾아가 할아버지 할머니께 읽어 드리는 ‘꽃송이 활동’을 펼치고 있다. 강릉=안철민 기자
《“오늘은 ‘꽃송이 활동’ 하는 날이에요.”(아이들)
“왜 꽃송이라고 부르니?”(기자)
환하게 웃는 아이들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책을 통해 마을 어른들에게 기쁨을 주는 ‘아기 꽃’이란 뜻이에요.”
강원 강릉시 왕산면 도마 1리에 있는 왕산 초등학교. 마을이 대관령과 삽당령 사이에 있어 산중턱의 학교가 마냥 작게만 보인다. 지난달 19일 오전 10시 반. 학교 교실을 새로 단장해 마련한 왕산마을도서관을 나서는 21명의 아이는 책을 두세 권씩 들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밖으로 나간다.
같은 시간. 둔지 마을회관 마루에 앉아 있는 10여 명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표정이 유난히 밝다. “아가들이 언제 올까?”》
“할머니 책 읽어 드릴게요” “손자가 읽어줘 더 재밌네”
○ 책을 들고 주민들 속으로
왕산마을도서관은 3월 9일 개관했다. 본보와 함께 ‘고향 학교에 마을도서관을’ 캠페인을 펼치는 ‘작은 도서관 만드는 사람들’(대표 김수연)의 지원으로 책 3000여 권을 구비했다. 별도의 공간이 없어 다목적으로 쓰는 교실에 도서관을 설치했다.
환경은 열악하나 마을도서관 개관 이후 아이들의 독서량은 몰라보게 늘었다. 매일 아침독서 시간을 갖고 있다. 도서관 담당 황은희 교사는 “마을 도서관이 생긴 뒤 대부분의 아이들이 50권 이상 책을 읽었다”며 아이들 독서 카드 목록을 보여 준다.
하지만 왕산면 주민들의 집이 대관령 대기리부터 목계리, 도마1, 2리까지 넓은 지역에 분산돼 있어 이 도서관이 ‘마을도서관’으로 자리를 잡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황 교사는 “이런 지리적 특성 때문에 주민들이 도서관에 오기가 쉽지 않다”며 “이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에게 책을 들고 찾아가자’는 운동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까운 둔지 마을회관의 도마 경로당으로 달려간 이유다. 이날은 왕산초교 아이들이 왕산마을도서관에 있는 책을 들고 가서 경로당의 할아버지 할머니께 책을 읽어 드리는 날이다. 전교생이 21명인 왕산초교의 아이들은 이 행사를 ‘꽃송이 활동’이라고 부른다.
“할아버지 할머니, 건강하시죠. 오늘도 저희가 책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아… 우선 안마를 해 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은 10여 명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가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할아버지의 팔다리를 주무른다. 2분도 안 돼 아이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팔 힘이 약해 그다지 시원할 것 같지 않은데도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즐겁기만 하다는 표정이다.
안마가 끝나자 아이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둘러싸고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3학년 정동연 군은 ‘똥거름’이란 동화책을 최종옥(79) 할머니께 읽어 드린다. 최 할머니는 머리를 기울인 채 정 군이 읽는 글자 한 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최 할머니는 이 동네에서 ‘책 할머니’로 통한다. 마을도서관이 생긴 이래 독서에 푹 빠진 할머니 중 한 분이다.
“최근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독파했어요. 월요일이면 오전 9시쯤 도서관에 가서 일주일 동안 읽을 책을 골라요. 도서관이 생긴 뒤 15권 정도 읽었어요. 도서관이 생기기 전에는 책을 읽기는커녕 구하기도 쉽지 않았거든요.”
주양녀(86) 할머니도 “요즘 눈이 보이지 않아 책을 못 보는데 아이들이 책을 읽어 주니 그 자체가 좋다”고 거든다. 이규만(84) 장옥희(81) 씨 부부도 마냥 아이들이 사랑스러운 듯 아이들의 책 읽는 소리를 한 구절도 놓치지 않는다.
“눈에 안질이 있어 불편한데 책은 읽고 싶고…. 이런 것을 아이들이 메워 줍니다. 농촌에는 책이 많이 없어요. 가끔 신문이나 좀 볼까? 아이들 책 읽는 목소리 자체가 좋아요. 우리 마을에 아이들 울음소리가 없어져 가슴 아팠거든요.”
책 읽기가 11시 반경 끝나자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이들을 꼭 안아 준다. 헤어지는 게 마냥 아쉽다. “사랑해. 얘들아.” “건강하세요, 사랑해요.”
“교통 나빠도 책읽기 쉽게” 이동도서함 3곳 설치도
○ 매주 가족 수만큼 책 대출
왕산초교 아이들이 책 사랑을 나누기 위해 찾아가는 곳은 경로당뿐만 아니다. 아이들은 등교나 하교 시간에 열심히 책을 나른다. 오후 3시 반 7교시가 끝난 아이들이 책을 몇 권씩 들고 스쿨버스에 오른다.
왕산마을도서관으로 오는 데 교통이 원활하지 않은 지역에 책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이 도서관은 왕산면사무소, 고단분교장, 대기리 보건지소 등 3곳에 도서관 분소를 만들어 이동도서함을 설치했다. 월 3회, 분소마다 주민들이 선택한 책을 30권 갖다 놓는다. 분소가 생긴 뒤 주민 독서량이 월 5권으로 증가했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아이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더니 ‘엄마 아빠’의 책 읽기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다.
왕산마을도서관은 아이들에게 매주 가족 수만큼 책을 대출해 준다. 이 학교 아이들과 부모들은 ‘TV 끄고 책 보기’ 캠페인을 실천하고 있다. 도서관이 생긴 이래 책을 100권 읽은 김민경(4학년) 양, 54권 읽은 김경래(5학년) 군 남매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오빠. 난 세 권 가지고 간다. 할머니는 춘향전, 할아버지는 홍길동전, 아버지는 난중일기.”
“그래. 오후 7시쯤에 모여 책을 읽자. 아빠가 처음에는 안 읽으셨는데, 요즘은 가끔 읽으시더라. 가족이 모이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아. 난 어린이 삼국지를 읽고 있어. 장비가 성질 좀 죽여야 하는데….”
“난 ‘유리병 편지’. 책을 많이 읽으니 갈수록 어려운 책이 좋아. 도서관에 책이 더 많이 있으면 좋겠어.”
강릉=김윤종 기자 zoz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