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소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울산 미포만은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초가 몇 채가 서 있던 쓸쓸한 바닷가였다. 현대조선소는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을 열었다. 태완선 경제부총리는 배 한 척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기업인이 모래벌판에 조선소를 세운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던지 기공식날 저녁 자리에서 “각하, 제가 보기에는 조선소, 그거 될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술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담당 부총리가 생각 없이 그런 말을 하면 일을 어렵게 만듭니다. 다시는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 마시오”라고 호통을 쳤다는 이야기가 현대그룹 창업자 고(故) 정주영 씨의 회고록에 나온다.
‘맨땅에 헤딩’한 지 30여 년 만에 한국은 세계 최고의 조선 국가로 올라섰다. 현대중공업과 계열사인 현대미포조선 삼호중공업 3사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25%. 현대중공업은 설계인력만 1200명에 이른다. 세계 최고였던 일본을 추월한 것도 배의 모델을 팔던 일본과 달리 현대는 선주들의 주문에 따라 설계한 맞춤형 선박을 건조했기 때문.
30만 t 컨테이너선은 전장(全長)이 축구장 세 개를 이어 놓은 길이다. 이 배가 짐을 싣고 시속 50km로 달리려면 10만8000마력 엔진이 필요하다. 140마력 소나타 엔진 800대가 동시에 내는 힘이다. 현대중공업의 세계 선박엔진 시장점유율은 35%로 독보적이다.
‘미포만의 기적’ 세계 최대 조선소
현대중공업은 한국 조선업의 사관학교 노릇을 했다. 현대에서 배운 일꾼들이 각 조선소로 퍼져 나갔다. 정주영 씨가 울산조선소를 방문한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에게 “형님, 조선소 한번 해 보십시오”라고 한 말이 삼성중공업의 시작임은 유명한 이야기다.
민계식(65) 현대중공업 부회장은 마라톤 풀코스(42.195km)를 200회 넘게 완주한 기록을 갖고 있다. 민 부회장은 지금도 직원들이 퇴근한 오후 6시부터 오전 2시까지 연구개발에 몰두한다. 그는 최근 시험 가동한 잠수함이 설계보다 1.5배나 깊은 잠항심도(潛航深度)를 기록했다고 자랑했다. 잠수함이 바다 깊이 들어가면 철판 찌그러지는 소리가 나지만 이 잠수함에서는 아무런 소음이 들리지 않았다.
한국 해군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갖는 이지스함 ‘세종대왕함’도 현대중공업이 만들고 있다. 크기는 작지만 1조 원짜리 군함이다. 선체 가격은 그중 3분의 1에 그치지만 0.1mm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록히드 마틴사의 최첨단 무기를 장착하는 이지스함의 선체를 우리 기술로 설계 제작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조선업이 몰락한 스웨덴에서 1달러를 주고 사 온 골리앗 크레인 ‘말뫼의 눈물’ 아래서는 현대가 개발한 육상 건조방식으로 선박을 짓고 있었다. 현대는 선박 주문이 밀려 새 독(dock)을 만들 시간도 공간도 여의치 않자 육상에서 선박을 건조하고 레일에 실어 바지선으로 옮겨 배를 띄우는 공법을 개발했다.
필자가 방문한 날은 토요일인데도 전체 2만5000명 직원 중 1만2000명이 나와 2010년까지 밀린 일감을 소화하느라 땀을 흘리고 있었다. 민주화 이후 노동운동이 활화산처럼 타오르던 1980년대 후반에는 이 회사도 극심한 노사 분규를 겪었다. 그러나 노사 관계 원칙 지키기와 ‘삶의 질 향상’형 복지로 노사 분규를 극복했다. 회사는 노조가 무리한 요구를 하며 파업을 벌이면 무릎을 꿇지 않고 무노동 무임금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자 노조도 임금 없는 파업을 포기했다.
직원들의 평균 연봉은 6600만 원이고 사원 주택보급률은 95%. 청소원과 운전사에게도 자녀 대학등록금을 대 준다. 요즘 현대중공업 노조는 회사와 투쟁할 거리가 없어 사랑의 장기 기증운동, 소년소녀 가장 돕기, 경로 행사 같은 ‘노조의 사회 공헌’ 모델을 실천하고 있다.
‘기업가 정신’ 1등 국가
울산 동구는 일본의 도요타 시에 못지않은 기업도시의 전형이다. 현대중공업은 울산에서 중고교 5개와 울산대 울산과학대를 운영한다.
피터 드러커는 저서 ‘넥스트 소사이어티’에서 기업가 정신 1등 국가로 한국을 꼽으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약 40년 전만 해도 한국에는 기업이 전혀 없었다. 한국을 몇십 년 동안 지배한 일본이 기업과 고등교육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남한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오늘날 한국은 24개가량의 산업에서 세계 일류 수준이고 조선과 몇몇 분야에서는 세계 선두 주자다.”
한국을 1등 국가로 만드는 영웅들은 지금 기업에 있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