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기후 변화에 대한 경각심을 높인 공로로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과 유엔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IPCC)가 올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하지만 기후 변화처럼 서서히 다가와 깊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칠 일이 국제경제 환경에 나타나고 있다. 달러 가치 추락으로 촉발된 기축통화 질서의 변화다.
1944년 브레턴우즈체제 도입 이후 지속돼 온 ‘팍스 달러리엄(pax dollarium·달러가 주도하는 세계경제 질서)’이 저물고 있다. 달러 가치가 1973년 변동환율제를 도입한 후 최저로 떨어지면서 달러에 대한 신뢰도 급격히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로 대비 달러 환율은 1999년 1월 1.16달러(기준고시 기준)에서 지난 주말 1.41달러로 올랐다(가치 하락). 전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달러가 차지하는 비중은 올 1분기(1∼3월) 64.2%로 1999년 이후 가장 낮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도 최근 “달러 패권이 끝나 가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 같은 달러 가치 하락은 미국이 천문학적 규모의 무역 및 재정적자를 더는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쌍둥이 적자를 메우기 위해 장기 국채를 발행하면 일본 중국 한국 등 무역 흑자국이 이를 소화했다. 시뇨리지(화폐 액면가와 발행 비용의 차액)만으로도 적자 걱정을 많이 덜었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끝나 가고 있다. 미국도 금리를 내리고 달러 가치 하락을 통해 무역수지 개선에 나서고 있다.
달러 가치 하락의 영향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이는 미국이 그동안 강한 달러와 쌍둥이 적자를 통한 왕성한 소비로 제공했던 거대한 시장을 더는 제공할 수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구매력과 시장을 기반으로 성장해 온 전 세계 경제가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미래학자 레스터 서로(‘세계화 이후의 부의 지배’)는 ‘달러 가치 폭락’을 거대한 혜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것에 비유했다. 영화 ‘딥 임팩트’에서 혜성 충돌로 지구가 받는 충격과 같은 큰 영향을 세계경제가 달러 가치 추락에서 받는다는 것.
그는 달러 값이 떨어져 미국의 구매력이 4500억 달러 줄어들면 미국에서 900만 개, 미국 이외 국가에서는 2000만∼2500만 개의 일자리가 없어진다고 경고했다. 딥 임팩트를 가장 크게 받을 나라는 미국과의 교역에서 흑자를 보며 성장한, 바로 한국 같은 나라다.
유럽 각국도 ‘저달러’에 비상이 걸렸다. 이번 주 금요일 열리는 주요 7개국(G7)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 회의는 ‘화폐 기후 변화 대책 회의’에 가깝다.
‘달러 제국’에서 밀려난 미국은 앞으로 경제적으로는 더욱 ‘미국의 이익’을 앞세울 것이다.
미국 민주당의 유력 대선후보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최근 “20세기의 무역은 미국에 이익이 됐지만 앞으로 무역의 역할은 세심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화당 정부가 체결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보여 준다.
우리가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유리하고 유익하다고 판단한다면 FTA가 됐든 뭐가 됐든 과거와는 다른,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야 한다. 그것이 처지가 달라진 상대와 관계를 지속해 가는 요령이다.
구자룡 국제부 차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