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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정성희]날씨도 사람 책임이다

입력 | 2007-10-16 20:46:00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끈 ‘미드(미국드라마)’의 원조는 뭐니 뭐니 해도 ‘X파일’이 아닐까 싶다. 풍부한 감성의 멀더와 냉철한 스컬리. 미국연방수사국(FBI)의 남녀 요원이 펼치는 기기묘묘한 스토리와 컬트 취향이 골수 팬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비를 만드는 사나이’란 에피소드가 X파일 내용 중 가장 황당하면서도 재미있었다.

마녀사냥 불렀던 중세 혹한

얘기는 몇 년 동안 비가 한 방울도 오지 않은 마을에서 시작된다. 멀더와 스컬리 요원이 그 지역 이상기후의 원인을 조사하러 떠난다. 그래서 밝혀진 놀라운 진실은…. 기상청 직원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그 직원의 감정상태가 날씨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는 자신이 날씨를 조정해 온 사실조차 모른다. 멀더가 스컬리에게 묻는다. “날씨는 사람들의 기분에 큰 영향을 미치죠. 그렇다면 반대로 사람이 날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안 되나요”라고. 그리고 인상적인 마지막 장면. 그 직원이 고교 시절부터 짝사랑해 온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 햇볕 쨍쨍하던 하늘에서 단비가 쏟아진다.

인간의 감정이 날씨를 바꾼다는 발상이 신선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인간이 날씨의 일방적 지배를 받아 왔다. 변덕스러운 날씨 앞에 무력하기만 했던 인간은 날씨를 신의 감정 표현이나 징벌 수단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자연이 내리는 최대의 공포인 번개가 무서웠던 인간이 제우스를 ‘번개의 신’으로 묘사한 것이 단적인 예다.

중세시대에도 궂은 날씨는 신이 보낸 재앙으로 여겨졌다. 1581∼95년 프랑스 로렌과 트레브 지방에선 2700여 명이 마녀나 마법사란 누명을 쓰고 화형에 처해졌다. 트레브 지방 생시메옹 마을의 사제는 “뜻밖의 기후변화로 몇 년에 걸쳐 흉작이 계속된 탓에 시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고 인심은 흉흉해졌다. 사람들은 악마의 부추김을 받은 마녀들 때문에 흉년이 계속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마녀재판을 연구한 역사가 볼프강 베링거는 유럽에서 마녀재판이 절정을 이룬 세 번의 시기가 최악의 혹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현대과학은 X파일처럼 인간의 감정은 아니지만 인간의 활동은 날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밝혀내고 있다. 관개시설 또는 다목적댐의 건설과 산림 개간은 생태계 변화를 초래하고 기온과 일사량까지 달라지게 만든다. 고층 빌딩과 포장도로가 열섬 현상을 일으켜 대도시는 시골보다 훨씬 무덥다. 9·11테러로 뉴욕에 쌍둥이빌딩이 사라지면서 맨해튼 일대의 번개 패턴이 바뀌었다는 보고도 있다.

올해 우리나라 날씨는 참 이상하다. 나라 전체가 6월 말부터 비에 젖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월 강수량이 평균 411.7mm로 1973년 이후 최대치였다. 슈퍼컴퓨터를 보유하고도 날씨 예측에 번번이 실패하는 기상청을 탓하는 이들도 있지만 날씨예측모델이 맞지 않을 만큼 이상기후가 잦은 것이 근본 문제일 것이다.

기후는 인간과 자연의 소통 과정

기상 전문가들은 한반도에 비가 많아진 원인으로 지구 온난화를 꼽는다. 기온이 올라가면 육지나 바다에서 증발량이 많아지고 증발된 수증기는 대기 속에서 순환하다가 물리적 지형적 조건이 맞으면 비가 돼 내리는 것이다. 온난화는 기온 상승뿐 아니라 지구 전체의 습도를 높이고 있다고 ‘네이처’지 최신호는 전하고 있다.

지구 온난화는 인간 활동이 날씨에 영향을 준 가장 분명한 사례다. 19세기 석탄시대, 20세기 석유시대가 21세기의 이상기후를 빚어 낸 것이다. 올해 다보스포럼부터 유엔총회, 노벨 평화상까지 국제사회가 기후 변화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것도 기후에 대한 인간 책임을 일깨우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인간은 날씨의 영향력 아래 있는 수동적 존재만은 아니다. 인간은 자연세계의 일부이고, 자연과 상호작용하고 있다. 인간과 날씨의 관계에 대한 분명한 각성(覺醒)이 기후 변화의 재앙을 막는 해법의 기초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