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죽어본 것들을 만난 적이 있으신지 돋아나는 새잎 같은 푸름도 시들어 떨어진다는 걸 알고도 피어나는 아아, 알고도 살아나는 어여쁘고 천진한 죽음을 맞은 적 있으신지. ―‘청명’ 중에서》
아버지를 묻고 잇달아 형을 태운 한 사내가 있다. 오래된 그늘에 끌려들어가 죽은 자들을 골똘히 생각하는 사내가 있다. 그에게 와서 죽은 이들, 죽어서도 끝끝내 떠나지 않는 이들. 살아남은 사내는 번뜩이는 그늘과 같은 죽음에 잠기는데, 망자들은 죽은 사내의 몸속에 떵떵거리며 살아간다. 사내는 생각한다. 죽은 자들은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들어와 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 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떵떵거리며’)이라고.
호두나무 아래 앉은 이 사내, 부모 살았을 때 잘하라는 말을 생각한다. 살았을 적에 잘하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죽은 자가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하는데. 산다는 것은 ‘고락을 한데 버무려 짠 단술 한 모금 같은 것’인데. 사랑한다는 것은 ‘먼지로 흩어진 것들의 흔적 한 톨까지도 끝끝내 기억한다는 것’인데. 잘한다는 것은 ‘죽은 자를 영원히 잊지 못한다는 것’인데. 그러므로 이 사내, 윙윙거리는 울음소리로 죽은 자를 몸속에 받아들이려 한다.
그런데 살아남아 음복하는 이 사내의 낯빛은 왜 이리 파리하며, 두 손은 왜 까맣게 식어 가며, 두 다리는 오래 매 맞은 사람처럼 삐거덕거리는가. 늙고 병든 사내에겐 진정 휴식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목련나무 아래 햇볕을 쬐고 있는 낡은 의자처럼. 목련꽃 가슴팍에 받아 달고 ‘의자에 앉아 쉬는 의자’처럼. 의자에게도 의자가 필요한 법이니까. 죽은 자를 영원히 잊지 못하는 것은 죽은 자와 함께 쉬는 것일 수도 있으므로.
‘죽은 자가 모두의 기억 속에서 깡그리 죽어 없어진 뒤에도 호두나무 그늘을 갈구리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가 바지에 똥을 묻힌 채 헛간 앞에서 쉬던 생전의 그를, 젖은 날 마당을 지나가는 두꺼비마냥 뒤따라가 그의 자리에 앉아 더불어 쉬는 것.’(‘호두나무 아래의 관찰’)
‘그늘과 사귀다.’ 누가 과연 죽은 자와 더불어 쉬고 죽음과 사귀려 하겠는가. 아비를 묻고 형을 태우고 난 후, 광릉 숲 어느 그늘에 앉은 시인이라면. 숲에 서서 나무들의 만 갈래 찢어진 손을 보며 ‘껴안는다는 것’의 의미를 파악한 시인이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 시인 이영광은 죽음이 배어 불룩한 무덤을 껴안고, 기억 속에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망자를 껴안고, 강철 이빨로 물고 뜯고 사생결단하는 고통의 배후를 껴안는다.
‘껴안는다는 것은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숲’ 중에서)
이 가을, 떨어지는 낙엽과 아침 찬바람에 늙음을 떠올린다면, 혹은 죽음을 떠올린다면, 기꺼이 그 죽음의 그늘들과 사귀어 보는 것은 어떨는지. 호두나무 그늘에 앉아 죽음과 함께 쉬어 보는 것은 어떨는지. 기어이 골다공증에 걸리고 말 것을 알면서도 바람을 통과시키는 저 시인처럼.
천운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