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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소설가가 추천하는 가을 시선 20]먼 바다

입력 | 2007-10-18 03:01:00


《가을, 노적가리 지붕 어스름 밤 가다가 기러기 제 발자국에 놀라 노적가리 시렁에 숨어버렸다 그림자만 기우뚱 하늘로 날아 그때부터 들판에 갈림길이 생겼다. ―‘들판’ 중에서》

‘내리는 사람만 있고/오르는 이 하나 없는/보름 장날 막버스/차창 밖 꽂히는 기러기떼,/기러기뗄 보아라/아 어느 강마을/잔광(殘光) 부신 그곳에/떨어지는가.’(‘막버스’)

박용래의 시 전집 ‘먼 바다’와 만난 것은 20대 초입이었다. 동인천역 부근 대한서림에서 2800원을 주고 산 뒤 이 시집은 마음 귀퉁이에서 한 번도 자리를 떠난 적이 없다. 서울살이를 시작하면서 숱하게 전전했던 변두리의 빈방에서 저녁 무렵 펴들고 읽기 시작하면 고향집 창호지에 가득한 저무는 햇살이 떠오르곤 했다. 한 시인이 평생을 쓴 시 치고는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채 300쪽이 되지 않는 이 시 전집은 어느새 책등이 누렇게 변해 버렸다. 그러나 그 세월만큼 이 시집의 시들 속에는 젊은 날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살아온 삶의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다.

박용래의 시적 특징으로는 토착 정서나 한의 정서, 소멸해 가는 세계에 대한 연민 등이 거론된다. 이러한 그의 시세계는 ‘가을’과 ‘저녁’ ‘기러기’로 나타난다. 이 시어들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긴밀히 연결돼 서러운 풍경으로 아스라하게 떠오른다. 생명의 절정에서 죽음으로 조락해 가는 계절인 가을 저녁, 황혼 속에서 해는 하늘의 중심에 떠 있다가 서서히 사라져 간다. 그 가을 저녁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떼. 박용래의 시에 나타나는 상실감의 밑자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시인이 15세 때 죽은 누님과의 이별이다. 시인의 마음속에서는 늘 홍래(鴻來)라는 이름의 기러기가 날아오른다. 시인은 그때의 정황을 산문집 ‘우리 물빛 사랑이 풀꽃으로 피어나면’의 한 귀퉁이에 적어 놓았다.

“누님은 만혼이었다. 스물여덟이던가, 아홉, 선창가 비 뿌리던 날, 강 건너 마을로 시집갔다. 목선을 타고. 목선에 오동나무 의걸일 싣고 그 무렵 유행이던 하이힐 신고 눈썹만 그리고 갔다.”

목선을 타고 강 건너 마을로 시집갔던 홍래 누님은 1년도 못 돼 세상을 떠났다. 중학교 2학년이던 시인은 울지도 못하고 시퍼렇게 얼어붙은 강심만이 원망스러웠다. ‘우렁 껍질/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바닥에 지는 햇무리의/下棺(하관)/線上(선상)에서 운다/첫기러기떼.’(‘下棺’)

그래서 이 예민한 소년이 오십이 되어서도 자신을 ‘오십 먹은 소년’(‘먹감’)이라고 했던가. 월명사는 죽은 누이동생을 위해 ‘제망매가’를 불러 극락으로 가라고 기원했다지만, 시인은 오십이 되어서도 죽은 누님을 떠나보내지 못해 소년으로 남아 있다. 내리는 사람만 있고 오르는 사람은 없는 보름 장날 ‘막버스’를 타고 가며 시인은 차창 밖에 꽂히는 기러기떼를 본다. 그리고 누님이 시집가는 날처럼 기러기가 무사히 강마을 잔광 속으로 내려앉기를 소망한다.

박용래의 시에는 탕아(蕩兒)의 가슴에도 가족의 소중함을 아로새기는 간절함이 있다. 그래서 이 시집을 펼쳐들면, 눈물 많은 아버지 무릎을 베고 창호지에 스미는 저무는 가을 햇빛을 바라보는 듯하다.

박형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