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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9년 비상계엄 선포

입력 | 2007-10-18 03:01:00


1979년 10월 15일 오전 9시 반경. 조용하던 부산대 교정 곳곳에 두 종류의 유인물이 뿌려졌다.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

“학원 민주화, 언론 자유, 인권 보장, 유신헌법 철폐, 독재정권 퇴진!”

두 선언문은 학생들에게 이같이 호소했다. 시위 집결지는 도서관 앞, 시간은 이날 오전 10시. 그러나 학생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16일 다시 부산대. 오전 10시 한 학생이 인문사회관과 도서관을 뛰어다니며 외쳤다.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합시다!” 이번에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독재 타도! 유신 철폐! 학원 사찰 중지! 구속 학생 석방!”

7000여 명에 이르는 시위대가 어깨를 겯고 경찰 저지선을 뚫었다. 그날 오전 11시경이었다. 시위대는 시내 중심가로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갔다.

오후 3시경 부산시내 국제시장에 시민 3만여 명이 모여들었다. 오후 8시경 시위대는 5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남포동 파출소를 부수고 경찰을 포위했다. 파출소에 걸린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 불태워졌다. 17일에도 시위는 이어졌다. 부산대엔 임시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부산대 학생과 동아대 학생들이 시내 곳곳에서 뭉쳤다.

박정희 정권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것은 18일 0시였다. 공수부대가 폭력을 휘두르며 시위대를 진압했다. 무자비한 진압에 수많은 시민이 다쳤다. 계엄군의 총칼 아래 부산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항쟁의 기운은 이미 마산으로 퍼졌다. 계엄령 선포 소식을 들은 경남대 학생들과 시민들이 “우리나라 거리마다 맑은 피를 뿌리자!”고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정부는 20일 마산과 창원에 위수령을 선포했다.

폭력적인 공권력을 앞세운 계엄령 앞에 결국 부마항쟁은 막을 내렸다.

부마항쟁이 한창이던 1979년 10월 17일. 그날은 박정희 정권이 유신체제를 선포한 지 7년째 되는 날이었다. 7년간 유신체제는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1979년 8월 YH무역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과 강제해산, 그해 10월 4일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등의 탄압이 잇따라 자행되기 전까지는. 독재에 대한 염증과 분노는 기어코 부마항쟁으로 터져 나왔고 유신체제의 조종(弔鐘)을 울렸다. 4·19혁명 이후 30년 만에 시민과 학생이 뭉쳐 독재에 저항했다. 1주일여 뒤인 26일 김재규가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