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부터 평범하고 사소한 일상의 모습들을 찾아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문학작품과 작가들을 소개하는 칼럼 ‘김지영 기자의 문학이 일상을 만날 때’가 ‘이 아침에 만나는 시’와 격주로 연재됩니다.》
‘제대로 삭았다. 이대로 한 이틀 말리면 되겠다. 벌써부터 지릿하고 알싸한 냄새가 목구멍에서 콧구멍까지 뚫고 나오는 듯하다… 꾸덕꾸덕 말려 손으로 짝짝 찢어먹어야겠다는 것이다.’(천운영 씨의 ‘명랑’ 중에서)
천운영(36) 씨는 이른바 ‘함바집’ 딸내미다. 공장장인 부친을 돕느라, 어머니와 딸이 일꾼 스무 명의 하루 세 끼를 도맡았다. 다섯 살 때 설거지를 시작해 몇 년 뒤에는 눈 감고도 국밥을 말 정도가 됐다. 딸이 대학 들어갈 무렵에야 어머니가 식당을 접었으니 천 씨의 요리 경력은 십수 년. 그는 소설집 ‘명랑’의 표제작에서 노쇠한 할머니에게 스미는 소멸의 그림자를 홍어 삭히는 장면과 잇대어 놓는다. 눈과 코와 손을 한꺼번에 자극하는 묘사는, 이 작가가 얼마나 오랫동안 먹을거리를 만져 왔는지 짐작하게 한다.
가을걷이로 풍성한 가을, 문학 작품에 종종 등장하는 음식 만드는 장면은 텍스트를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꽃게며 잡채며 연어 같은 ‘특별요리’로 가득했던 신경숙(44) 씨의 중편 ‘작별인사’(소설집 ‘딸기밭’ 중). 산에서 죽은 이의 영혼이 친구를 찾아오면서 이야기가 풀려 나가던 애잔함이, 음식이 주는 생기와 기이하게도 잘 어울렸다.
‘살짝 데쳐서 먹기 좋게 싹싹 잘라 낙지볶음을 만들어야겠다고 Y가 벌써 생각하고 있다. 국수사리가 있으면 더 괜찮을 텐데. 당근, 양파, 버섯, 대파들을 어슷어슷 썰어 넣어야겠다고. 고춧가루 대신 생고추 간 것을 쓰면 더 맛이 날 텐데’라는 묘사.
오늘 저녁은 낙지볶음을 해볼까 하는 독자도 있을 법. 작가의 지나온 삶도 떠오른다. 어렸을 적 여섯 형제에다 친척들까지 북적였고 사춘기 때 서울에 올라와선 오빠와 더불어 지내면서, 밥상에서 늘 다른 이들까지 챙겨야 했던 작가. 그래서인지 몸에 자연스럽게 밴 음식 맛이 작품 곳곳에 향기롭게 배어 있다.
남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음식 만드는 장면은 드물지만(직접 음식 만들 일이 거의 없어서인지), 백가흠(33) 씨는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 중 단편 ‘전나무 숲에서 바람이 분다’에서 장어탕 만드는 모습을 세심하게 묘사했다. 소설에서 사내가 여자에게 장어탕을 끓여줄 때 여자의 깊은 사랑의 상처는 위안받기 시작한다. 15년 자취생활로 “나물 빼고는 다 할 줄 안다”는 이 작가가, 장어탕 조리법을 얼마나 꼼꼼하게 취재했는지 소설은 한눈에 보여 준다.
자취는 사람을 단련시키는지, 박형서(35) 씨도 자취하던 대학 시절 전 주인이 남기고 간 화덕과 팬을 만져 보다 요리에 입문했다. 이 작가가 단편 ‘두유전쟁’(소설집 ‘자정의 픽션’ 중)에서 소개한 미역국 레시피는, ‘하루 200만 배럴의 원유와 맞먹는 머릿기름’이 나오는 청년이 주인공인 유쾌한 소설만큼이나 재미나다. 작가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석가모니처럼 스스로 깨달은 레시피”라고 한다.
‘미역을 물에 살짝 불렸다가 꼭 짜내고는 참기름을 슬쩍 두른 냄비에 듬성듬성 썬 쇠고기와 함께 달달 볶는다. 얼추 볶아지면 물을 적당량 붓고는 간 마늘과 간장을 넣어 정성들여 끓이다가 후추를 솔솔 뿌려 공손하게 남편께 드린다.’
이 재료와 저 재료가 섞이면서 새로운 맛이 나는 것은 이 단어와 저 단어가 짜이면서 하나의 작품이 나오는 것과 닮았다. 둘 다 손을 움직여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것도. 그 두 가지를 함께 누리는 즐거움, 여간 아닐 것이다. 그럼 오늘 저녁은 낙지볶음과 미역국, 소설 한 권.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