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나무병에/우유를 담는 일,/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밀 이삭들을 따는 일,/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떠나지 않게 하는 일,/숲의 자작나무들을/베는 일,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중에서》
1975년판 ‘프랑시스 잠 시선’에는 깨알 같은 활자판 해설이 ‘나는 괴로워하고 사랑하나이다’라는 말과 함께 시집 입구에 실려 있다. 곽광수 번역의 이 시선을 처음 보았을 때 시보다 먼저 해설을 읽었다(1995년 개정판이 나오면서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 해설에 매혹되었다. 가스통 바슐라르라는 철학자의 이름을 처음 본 것도 그때였다. 1970년대 남프랑스 작은 대학 도시의 한국 유학생이 ‘진리로 보이는 그 어떤 것’과 조우하는 순간의 감동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해설을 다 읽은 후에도 프랑시스 잠의 시편들보다는 먼저 서문을 읽었다.
‘주여, 당신은 사람들 가운데로 나를 부르셨습니다. 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는 괴로워하고 사랑하나이다. 나는 당신이 주신 목소리로 말했고, 당신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에게 가르쳐 주시고 또 그들이 내게 전해 주신 말로 글을 썼습니다.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나는 가겠나이다. 삼종(三鐘)의 종소리가 웁니다. 프랑시스 잠’
기도문 같은 서문을 처음 읽었을 때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어머니를 잊고 지낼 때, 내가 글을 쓰는 일보다는 다른 일에 마음을 쏟을 때, 내 태생이나 내 모국어의 연약한 기반에 좌절을 느낄 때…. 조롱당하고 있다고 여겨질 때 이 서문을 펼쳐 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를 읽곤 했다. 마음이 곤혹스러울 때마다 프랑시스 잠의 눈부신 보편성이 내 마음속의 모든 평범함의 후광이 되어 주곤 했다.
잠의 시들은 일부러 쓴 시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가 잠에게 온 것도 아니다. 그는 그의 본성대로 보고 듣고 느끼고 사랑하는 것들을 썼다. 그래서 ‘우리 집 식당에는 윤이 날 듯 말 듯한/장롱이 하나 있는데, 그건/우리 大姑母(대고모)들의 목소리를 들었고/우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은 것이다/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롱/그게 암 말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그건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라고 쓸 수 있으며, ‘나는 프랑시스 잠/지금 天國(천국)으로 가는 길이지(…) 푸른 하늘의 다사로운 동무들이여/날 따라들 오게나(…) 내 아끼는 가여운 짐승들이여’(‘식당―아드리앵 플랑테 씨에게’ 중에서)라고 당나귀에게 속삭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시 어디에도 정열이나 치열하게 부서져 깨지는 파탄의 기미를 엿볼 수 없다. 모든 누추한 일상을 수납한다. 비탄과 좌절을, 탄생과 소멸을 고요히 받아들인다. 경탄과 다정함과 당나귀와 함께 천국에 가겠다는 천진함이 넘쳐흐른다. 무엇이라도 제 몫이 있고 빛이 난다.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평온을 바라는 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시집이다.
키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