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동아광장/윤평중]직업 정치인으로 산다는 것

입력 | 2007-10-31 02:59:00


다시 정치의 계절이다. ‘소용돌이 정치’의 거품 속에서 정당이 급조되고 대권(大權) 주자가 양산되고 있다. 전부 아니면 전무일 수밖에 없는 선거의 속성상 사생결단의 싸움은 불가피하다. 선명성의 미명 아래 저질의 난폭한 표현이 난무하고 온갖 노회한 암수(暗數)가 검증의 이름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다. 권력의 풍향계에 따라 발 빠르게 줄서는 세간의 풍경도 여전하다. 선거를 앞둔 현실 정치가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는 현상은 어디서나 비슷하다. 대권에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 있으므로 대선을 앞둔 권력투쟁의 강도도 그만큼 처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사회 특유의 중앙 집중적 관(官) 위주 문화가 빚어 온 지나친 정치화 현상은 정치의 지평을 크게 왜곡했다. 직업정치가가 지도자로 존중받기는커녕 책략가나 협잡꾼 비슷한 존재로 인식되어 온 것이다. 사회 곳곳에 가득 찬 정치공학적 관심은 현실 권력정치의 이런 부정적 유산을 반영한다. 따라서 직업정치인에게서 음습한 권모술수의 껍질을 벗겨 내고 고유한 정체성을 찾아내는 일은 절박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점에서 독일 사상가 막스 베버(1864∼1920)가 죽기 1년 전에 남긴 강연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오래된 글이지만 강력한 현재진행형의 호소력을 지닌다. 베버에 따르면, 국가는 특정한 영토 안에서 정당한 물리적 강제력을 독점한 조직체다. 정치의 비정함은 이 원점에서부터 나오며 이는 정치권력을 경제권력, 문화권력, 사회권력 등과 차별화하는 결정적 준별점이다.

권력의 풍향 따라 줄서기 여전

국가라는 수레바퀴의 틀을 짜고 그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게 하는 책임은 합법적 강제력을 수단으로 가진 정치 영역에 궁극적으로 귀속되는 것이다. 정치인이 막중한 소명과 함께 고유의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권력에 내재한 근본적 폭력성을 다루어야 하는 정치인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열정, 균형감각, 책임의식’이다. 이런 자질이 어우러져야 국민의 생존과 국가의 명운이 담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열정은 대의에 대한 헌신이며 균형감각은 자신의 정열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현실을 냉철히 관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우리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열정의 정치인인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종종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균형감각을 상실한 열정은 ‘비창조적 흥분 상태’에 의해 추동되는 아마추어적 국정 운영으로 이어져 국가 대계를 위협하고 국민을 힘들게 한다.

정치인은 ‘선은 선에서, 그리고 악은 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일 경우도 있다’는 통찰을 항상 뼈아프게 되새겨야 할 존재다. 정치가의 사명이 ‘자기 행위의 예견 가능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는 책임윤리’로 압축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치인은 선하거나 정의로운 의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만 치세의 결과에 의해 판단될 뿐이다. 책임윤리의 원칙은 남한의 성공과 북한의 실패에 각기 결정적 발자취를 남긴 박정희와 김일성을 평가하는 정치적 준거일 수밖에 없다.

정치는 책략과 권력욕을 필연적으로 동반하지만, 직업정치인의 임무는 권모술수의 음지나 도덕성이라는 양지 가운데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복합성을 갖는다. 정치인에게 고유한 책임윤리는 결과를 따지지 않는 종교적 윤리와는 그 차원이 다른 것이다. 국가공동체의 운명을 궁극적으로 책임지는 직업정치인의 사명은 주관적 도덕성의 차원과는 다른 거시적 책임윤리를 실천하는 데 있다. 정치인으로 일가를 이루기 위해, 또는 역사의 흐름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이 순간에도 열심히 뛰고 있는 이들은 열정을 앞세우기 전에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과연 나는 자기 행위의 예측 가능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원칙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인가?’

베버의 ‘책임윤리’ 되새길 때

영어 단어 ‘Calling’에는 ‘직업’과 ‘소명’의 뜻이 함께 있다. 직업으로서의 정치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와 같은 말이며, 양자를 잇는 매개어가 책임윤리인 것이다. 현실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하는 전직 대통령, 중립적이고 공정한 선거관리 의무를 송두리째 내팽개친 현직 대통령, 거듭된 패배로 이미 퇴장 선고를 받았는데도 재기를 노리는 전(前) 대선 후보, 이들에게 직업정치인의 책임윤리는 무의미한 것인가?

윤평중 객원논설위원·한신대 교수·사회철학 pjyoon56@korne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