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로 가는 밤 기차 안, 자살을
부른다는 죽음의 찬송
‘글루미 선데이’를 (신나게) 듣고 있다.
헝가리 사람들은 이 불후의 명곡을 듣고 어떤 생각을 할까. 정말 자살충동을
느낄까. 아니면 너무 익숙해서 혹시
우리의 ‘아리랑’처럼 들리는 건 아닐까.
세계일주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도시 1호로 꼽은 곳이 바로 헝가리
부다페스트였다. 동유럽 최고의
음악도시이자 부다페스트의 아름다운
갈색풍경이 클래식 음악을 듣기에
최고라는 생각에 날짜를 손으로
꼽아 가며 기다려 왔다.
그런데 오자마자 사고를 쳤다.
얼마 전, 스페인에서 배낭을 도난당하는 통에 당분간 긴축모드에 돌입했건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 제일 비싼
공연티켓을 사 버린 것이다.
그것도 3일치나. 》
○ 상업뮤지컬이 절반 잠식…일부 배우 배역 독식 눈길
벽에다 큰 네모, 작은 네모를 수십 개 그려 가며 좌석 배치도를 보여 달라는 나의 말에 안경을 코에 얹은 티켓박스 아주머니는 도무지 못 알아들을 소리만 했다. 추측건대 “신용카드는 못 받는다니까요” 같았다. 따져 보니 티켓 1장에 1만6500포린트, 우리 돈으로 8만5800원 정도였는데 동유럽 국가의 낮은 환율에 비하면 지나치게 비싼 가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올해로 16년째를 맞는 부다페스트 가을 축제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지만, 일부 계층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게다가 현지 홍보가 부족한 탓인지 공연 정보를 얻기도 어려웠다.
오히려 들쭉날쭉한 다른 소규모 예술축제들이 즐비해 내가 머무는 동안에만도 부다페스트에서 그림전시축제, 영화축제, 가을축제, 음식축제, 프린지축제 등 열 개도 넘는 축제가 열렸다. 그래서인지 거리에서 만난 시민들의 대다수가 부다페스트 가을 축제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현지 오페라 하우스나 오페레타 극장에 가 보라고 권해 줄 뿐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놀라운 점은 변화무쌍한 부다페스트의 두 얼굴이었다. 동유럽 최고의 예술도시 부다페스트지만 이곳에도 어김없이 흘러 들어오는 상업뮤지컬에 이미 절반가량 자리를 빼앗기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현재 공연 중이거나, 곧 무대에 오를 작품만 보더라도 ‘오페라의 유령’ ‘맘마미아’ ‘알타보이스’ ‘미녀와 야수’ ‘캣츠’ ‘프로듀서스’ ‘로미오와 줄리엣’ 등 손꼽기가 힘들 만큼 많았다. 그나마 클래식은 아니지만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주요 레퍼토리인 뮤지컬 ‘모차르트’ ‘엘리자베트’ ‘루돌프’가 미국과 영국 뮤지컬 틈에서 인기를 끌고 있어 체면 유지를 하고 있었다.
또 한 가지 놀랄 만한 특징은 스타 배우 3, 4명의 배역 독식(?) 현상이었다. 현재 헝가리 최고의 남자 뮤지컬 스타로 꼽히는 돌하이 아틸라는 10월 22일부터 11월 26일까지 총 6편의 대형 뮤지컬과 여러 배우가 동반 출연하는 갈라 콘서트 3편에 출연한다. 한 달간 9편이라니! 돌하이는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인공 로미오 역을 맡은 뒤 이틀 후에 뮤지컬 루돌프에서 또다시 주인공 루돌프 역을 맡는다.
이런 현상이 몇몇 스타 배우에게만 해당되는 건지 헝가리 공연계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공연장에서 만난 일부 관객은 그게 무슨 문제냐는 양 나의 지적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 뮤지컬 스타들 풍부한 성량에 감탄 절로
그런데 빡빡한 공연 일정에도 불구하고 헝가리 뮤지컬 스타들의 성량은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빼어났다. 갈라 콘서트와 루돌프 공연을 통해 이틀 연속 지켜본 돌하이도 대단했다. 풍부한 성량과 세련된 외모로 여성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그의 겹치기 출연이 못마땅했던 나도 뮤지컬 ‘루돌프’를 보자마자 너무나 노래를 잘하고 멋진 그의 매력에 반해 즉시 팬클럽에도 가입했다. (아,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헝가리에서의 마지막 날, 모처럼 헝가리의 유명 오페라가수와 뮤지컬 가수들이 총집합하는 콘서트가 있다고 해서 찾아갔는데 헝가리의 공연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헝가리 출신 유명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임레 칼만의 탄생 125주년을 맞아, 기념 동상을 세우고 이를 기리는 콘서트였는데, 헝가리인들의 예술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부다페스트에 온 지 열흘째. 좋은 공연도 많이 보고, 기대보다 부실했던 축제에 실망도 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후에도 돌아가지 않고 칼만 동상에 입을 맞추던 수많은 사람의 모습만은 무척 인상적이었고 왠지 우리가 쉽게 넘을 수 없는 그들만의 예술혼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리고 부러웠다. 많은 세계인이 음악의 정취가 흐르는 부다페스트를 갈망하는 것처럼 한국의 도시들에도 이런 예술적, 문화적 이미지가 하루빨리 만들어지면 좋겠다.
유경숙 공연기획자 prniki1220@hotmail.com
■발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부다페스트에서 내가 선택한 첫 번째 작품은 발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였다.
내가 세상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발레로 본다는 게 무척이나 설레 일찌감치 공연장인 오페라 하우스를 찾았다.
휘황찬란한 로비는 영화 속 스칼렛의 대저택 계단처럼 화려했고 벽과 천장은 중세의 클래식한 벽화와 샹들리에로 반짝반짝 빛났다.
관객과 시설만 봐서는 이곳이 부유한 영국 런던 중심지인지 동유럽 부다페스트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초호화판이었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정장 또는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었고 여성 관객 중 3분의 1가량은 고급 밍크코트를 입고 와 의상보관소에 코트를 맡겼다(유럽 고급 공연장에서는 외투를 입고 객석에 들어갈 수 없는 곳이 많아 1∼3유로를 지불하고 의상보관소에 맡겨야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별점을 준다면 별 다섯 개 만점에 세 개 반. 비비안 리의 새침한 말투 대신 몸짓으로만 표현된 ‘스칼렛’은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 쇠약해 보이던 버틀러는 스칼렛을 리드하기에 좀 역부족인 듯 보였다. 심지어 전쟁터로 향하며 스칼렛에게 사랑을 구하는 장면에서는 몸놀림이 다소 불안하여 아름답기보다는 다소 버거운(?) 사랑처럼 보였다.
1시간씩 총 3막으로 구성된 스토리는 발레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유리한 파티 장면에 비교적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후반부로 갈수록 허겁지겁 마무리된 듯해 아쉬웠다. 전체적으로는 만족스러웠고 박진감이 넘치는 장면도 많았다,
서재에서 에슐리에게 퇴짜를 맞은 스칼렛이 화를 내며 찻잔인지 꽃병인지를 벽에 집어 던지는 영화 속 유명한 장면은 따귀를 때리는 것으로 바꿨는데, 가녀린 발레리나가 어찌나 손에 힘을 넣었던지 뺨 맞은 에슐리의 머리가 휙 돌아가 객석이 잠시 웃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퀴즈 하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는 발레 공연이지만 유일하게 토슈즈를 신지 않는 캐릭터가 한 사람 나온다. 누굴까? 답은 뚱뚱하고 까만 유모 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