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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의 별]연출가 박근형 ‘영혼의 안식처’ 가수 송창식

입력 | 2007-11-03 03:03:00


가슴 없는 시대, 그 웃음이 그립구나 피리 부는 사나이여!

피리 부는 벌판의 청년 송창식이여!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에헤헤 으헤 으헤 으허허 일이삼사오육칠팔구하고십이요 에헤헤 으헤 으헤 으허허.’

무슨 노랫말이 랩도 아니고 ‘으헤 으헤 으허허’라니.

영화 ‘25시’에 나오는 앤서니 퀸의 마지막 표정 같은 이 미묘한 노랫말. 도대체 웃는 것인지, 울부짖는 것인지 누가 이토록 무심하면서 처절한 외침의 놀라운 노래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까까머리 중학생 때 텔레비전을 통해 송창식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기타를 메고 비 오듯 땀 흘리며 음악에 열중하다가 때론 지그시 눈 감고 두 팔을 벌려 허수아비 몸짓으로 부르던 노래를 몇 박자 쉬 넘기기도 하고 이내 폭풍이 몰아치듯 또 남은 노래를 마저 했다. 자기만의 표정으로 자기 생각을 뿜어 대는 사람은 보기 드물다. 그래서 송창식은 호소력이 있고 사람들은 손뼉 치며 편안해했다.

그의 노래를 듣던 내 가슴은 요동쳤고 이 희한한 가수가 궁금해졌다. 내 속을 다 열어 나를 시원하게 만드는 저 위대한 아티스트는 누굴까. 마치 나를 위해 만든 듯한 노랫말로 로테를 짝사랑하는 베르테르의 심정을 어찌 저리 절절이 표현할 수 있을까. 잠 못 이루는 사랑의 열병과 사랑의 쓰라린 아픔을 어찌 저리 잘 표현하는지. 인간의 얼렁뚱땅 방랑 기질을 어쩜 저리 잘 읽고 노래하는가.

혹시 저 송 씨 형이 6·25전쟁 때 폭격으로 죽었다던 우리 이복형이 아닐까, 어머니께 물어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송창식은 무대에서 자기 맘대로 서 있고 자기 맘대로 춤추었다. 자신의 시를 부드럽게, 때론 소리치듯 자유롭게 낭독하고 있었고 그것은 그만의 노래가 되었다. 나는 송창식의 노래에 빠져 들었고 그가 좋아졌다.

그렇게 몇 번, 몇 년 동안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보던 어느 날, 나는 감은 듯 작은 그의 실눈 속에서 피리를 불며 한가로이 들판을 거니는 한 청년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청년은 장발이고 청바지에 맨발이었다. 청년에겐 철 지난 바닷가 사랑의 쓸쓸한 추억도 있고, 비행을 꿈꾸지만 갈 곳 몰라 방황하는 작은 새의 실존의 덧없음도 있고, 동해에 떠오르는 태양의 숨결을 간직한 청춘의 심장도 있었다. 그러나 청년은 언제나 한결같은 웃음이 있었다.

나는 청년 송창식의 노래가 더 좋아졌고 혹시 송 씨 형이 폭격을 피해 살아남은 내 피붙이 큰형이 아닐까 하는 이런 엉뚱한 생각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극단 막내 생활을 하며 어깨너머로 연극 공부를 하고 있을 때 세상이 다 내 것인 양 무서움 모르는 하룻강아지 시절이었다. 아침 일찍 도심에 연극 포스터를 붙이러 나온 나는 국도극장인가 앞에서 하길종 감독의 ‘바보들의 행진’ 상영 포스터를 보게 되었고 앞뒤 가릴 것 없이 11시 조조영화를 보러 극장에 들어갔다.

타이틀이 깔리고,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청춘의 우상 ‘맨발의 피리 부는 청년’을 다시 만났다. 청년은 비틀대며 ‘왜 불러’를 외치다 경찰을 피해 도망치고, 술 취한 채 돋보기안경을 쓰고 ‘고래사냥’을 떠나 자전거에 몸을 싣고 바다로 사라졌다. 나는 그날 극장 안에서 보았다. 느꼈다. 동시대를 살며 내 한 몸 갈피 잡기 힘든 때 홀로 벌판에 서 의연히 바람 맞는 우리의 형님들과 청년들을 보았다. ‘바보들의 행진’은 내게 잊을 수 없는 감동과 충격이었다.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진실은 진실 아닌가.

숨죽이고 말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았던 젊음의 아픔을 담은 영상도 훌륭했지만 소리로만 듣던 송창식의 노래들이 영상과 힘을 더해 오래오래 내게 깊은 자극이 되었다.

그렇다. 송창식의 노래는 휴식이자 용기다. 무엇보다 음악을 모르는 내게 그의 음악은 내 모든 음악의 잣대 중 하나이다. 그리고 송창식, 그가 내 형이라는 확신이 백 프로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인간 송창식을 모른다. 한 번도 그를 만나 인사 나눈 적 없고, 그러니 대화를 한 적은 더더욱 없다. 단지 그의 노래를 듣고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 뿐. 짝사랑 연민으로 벌판에서 피리 부는 그를 상상하고 믿어 왔고 그런 그는 30년 나의 일방적 짝사랑을 무너뜨린 적이 없었다.

나는 송창식의 ‘사랑이야’와 ‘우리는’을 듣고 청춘을 보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들으며 사랑을 했다. 나는 그토록 쉽고 절실하며 따뜻한 노래를 들은 적이 없다. 그의 노래는 내 사랑의 향이다.

20대 초반 무전여행을 한답시고 이곳저곳 빈털터리 거지꼴로 다니다가 석굴암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불국사 뒷산 굽이굽이 토함산을 오를 때, 해는 점점 져 오고 가파른 계단은 끝이 없고 나는 쉬며, 포기하며 토함산의 그 돌계단에서 얼마나 다리 풀리며 흔들렸던가. 그때 비틀대며 기진맥진 정신없을 때 송창식의 ‘토함산’을 몇 번이나 불렀던가. 그때 “맨발로 땀 흘려 걸어서 올라라” 그 구절을 얼마나 믿으며, 읊으며, 억지 깡을 부리며 그 계곡을 올랐던가. 그 노랫가락이 없었다면 나는 무엇에 기대고 그 가파른 계단을 올랐을까.

송창식은 거인이다. 이 좁은 땅, 몇 안 되는 거인 중에 거인이다. 사람들은 술잔을 채우지 못해 안달하지만 그는 잔을 채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잔을 반쯤 채우고 마시고 싶을 때 느긋하게 한 모금 한다. 그러다 그 잔이 지겨우면 휘익 어디론가 내던진다.

나는 우리의 청년 송창식이 다시 팔 떠억 벌리고 저 경기도 퇴촌 어디를 지나 그 아가씨가 사는 그 담배 가게를 지나 참새와 허수아비가 허물없이 노는 그 논두렁 건너 콩나물 순두부 해장국 파는 우리의 난장판 시장 안에서 “으헤 으헤 으허허” 노래하길 바란다.

언제나 웃는 그의 모습, 허수아비처럼 피리를 들고 우리 모두 바람 따라가는 떠돌이 인생이라는 것을 되새겨 주며 자유롭게 노래하고 맘대로 춤추고 그때 그 거인의 웃음으로….

박근형 연출가

■송 씨 “새 앨범? 나올 때 되면 나오겠지요”

“박근형 씨는 나이가 어느 정도 되시는 분이에요?”

연출가 박근형 씨의 원고 내용을 일부 전해 들은 송창식 씨는 박 씨의 나이를 물었다. 송 씨는 자신의 노래 세계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해 준 ‘그’에 대해 많이 궁금해했다. 대학로 연극계의 ‘유명 인사’인 박 씨지만 송 씨는 그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 40세 남짓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그럼 무언가 말할 수 있는 나이인데…”라며 만족스러워했다.

자신을 ‘나서지 않는 거인’으로 표현한 박 씨의 글에 대해 송 씨는 “표현 자체가 너무 호의적이라 뭐라 말하기 남우세스럽다”면서 “급하지 않은 것뿐이지 항상 다른 사람들이 가진 사회의식을 지니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억압적인 유신 시대 분위기를 비판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년)에서 불린 그의 노래 ‘고래사냥’과 ‘왜 불러’는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0년대 중반까지 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송 씨는 당시에 대해 “급하기도 했고 지성적으로 많이 발달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엄청난 추억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시기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면 결혼했다는 것, 그런 정도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매일 오후 2시에 일어나 많은 시간 노래 연습을 한다.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 내는 연습, 체력 훈련 등을 함께 한다. “노래를 하기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요계 복귀 계획은 아직 없다. “늘 마음은 있지만…. 뭔가 모멘트가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 생기네. 1990년대에 가요계가 댄스 위주로 전환되면서 분위기가 어려워졌어요.”

그래도 ‘송창식’이라는 이름 석 자가 지니는 의미는 간단치 않다. “남들은 책임의식 이야기도 많이 하는데 그건 내가 있는 걸로 충분하다고 봐요. 판은 나올 때 되면 나오는 거고, 노래하는 것을 녹슬지 않게 가다듬고 있으니까….”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