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전쟁의 나라/서영교 지음/431쪽·1만5000원·글항아리
“말에는 한계중량(pivotal point)이 있다. 한계중량이란 짐이나 갑옷 등의 무게가 말의 능력을 저하시키는 지점을 말한다. 절대적 기준은 아니지만 경주마의 경우 말 체중의 13%다. 가령 400kg의 말이라면 52.5kg이 한계중량이다. 중장기병의 갑옷이 극도로 무거워졌을 때 그들은 기병이 아니라 보병이 되었다.”
고구려 벽화에 자주 등장하는 중장기병. 병사뿐 아니라 말까지 강철갑옷으로 무장한 이들이야말로 백제와 신라는 물론 북방 유목민과 중원 국가들까지 위협한 고구려 군사력의 중핵으로 인식되고 있다. TV 드라마 ‘주몽’이나 ‘태왕사신기’에서 멋진 갑옷으로 무장한 주인공이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고대 전쟁사를 전공한 필자(충남대 인문과학원 연구원)는 이를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등장한 도구와 물질 중심의 사고가 낳은 근대적 신화라고 비판한다. 839년 장보고의 기병 3000기가 신라 민애왕의 10만 병력을 격파한 것이나 1126년 17기의 금나라 기병이 단 한 명의 전사자도 없이 2000명의 송나라 보병을 궤멸시킨 것도 중장비 무기의 승리가 아니라 말과 하나 된 기동력의 승리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고대 기병의 위력은 사람과 혼연일체로 훈련시킨 말을 탄 채 자유자재로 활과 창을 다룰 수 있는 기동력에서 나온다. 그에 따르면 주몽과 그의 군대는 무쇠갑옷으로 중무장한 기사가 아니라 가죽옷을 입고 달리는 말 위에서 신속하고 정확하게 활을 쏘는 인디언에 가깝다.
인류의 발전사를 수렵민-유목민-농경민 순으로 바라보는 것은 ‘죽은 교과서’의 시각이 된 지 오래다. 유목민을 찬양하는 ‘호모 노마드’라는 표현이 등장하면서 그것은 발전단계가 아니라 자연환경에 따른 인류의 선택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고구려 700년 역사를 전쟁사의 관점에서 새롭게 분석한 이 책은 수렵민에 대한 찬가를 담고 있다. 저자는 고구려를 유목민의 나라가 아닌 수렵민의 나라로 파악한다. 고구려 역사가 전쟁으로 점철된 것은 농경민과 유목민에 대한 약탈경제로 운영됐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고구려는 수와 당과 같은 농경제국에 맞서면서 선비, 말갈, 거란, 돌궐 등의 유목민을 자신들의 위성 세력으로 포섭한 사자의 용기와 여우의 교활함을 갖춘 수렵민의 나라다.
통념을 깨는 이런 신선한 시각은 고구려 산성을 수세적 농성 공간이 아니라 적진을 휘젓고 돌아온 기병이 쉴 수 있는 공세적 격납고로 재해석하거나 고구려 700년 역사의 저력을 중추신경이 수도로 집중된 고도 문명국가가 아니라 팔다리와 몸통으로 분산된 원시국가적 면모에서 찾는 데서도 발견된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