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창의 11월은 잔인했다. 1997년 11월에는 DJ와 JP가 손을 잡았고, 2002년 11월에는 노무현과 정몽준이 ‘러브 샷’을 했다. 12월의 대선 결과는 연패(連敗)였다. 1997년에는 이인제가 경선에 불복하고 뛰쳐나가 그의 앞길을 막았고, 2002년에는 김대업의 흠집 내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더 본질적인 패인(敗因)은 이 씨 자신과 한나라당, 더 넓게는 보수우파 모두에게 있었다고 봐야 한다. 나라 경제를 거덜 냈던 1997년 외환위기에서 집권여당과 우파 권력 엘리트들이 책임을 면할 수는 없었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투표에 의한 여야 정권교체가 가능했던 첫 번째 요인도 거기에 있다.
환멸과 악몽 사이
2002년에는 대세론에 안주하며 선거도 하기 전에 ‘과실(果實)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회창의 패배는 ‘철없는 젊은 애들’이 뒤늦게 ‘노무현 살리기’에 나선 탓이 아니다(2002년 대선의 20대 투표율은 56.5%로 평균투표율 70.8%보다 크게 낮았다). 이회창 후보와 한나라당이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권의 집요한 네거티브 공세 또한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점을 무시할 수 없더라도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그렇게 10년 ‘진보좌파 정권 시대’가 이어졌고 이제 그 막을 내리려 하고 있다. 이 또한 거역하기 어려운 시대의 흐름이다. 민주개혁 담론은 시들해졌고, 많은 사람은 오히려 그것을 독점했던 진보좌파 세력의 오만과 독선, 무능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그들에 대한 환멸은 반사적으로 보수우파에 기대를 걸게 했고, 이명박 후보의 높은 지지율은 그런 기대치의 반영이다.
이명박 지지율의 허점은 그것이 반사적 기대라는 데 있다. 좋게 말해서 ‘차선(次善)의 선택’이다. 즉 “이명박이 비록 도덕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무능한 진보좌파 세력보다야 낫지 않은가. 말만 많고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노무현류’는 이제 싫다. 그러니 이명박을 지지할 수밖에 없지 않으냐”는 얘기다.
여기에 이명박 지지율의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미국으로 달아났던 김경준이 이달 중순 송환되고 ‘BBK 주가조작 사건’과 관련해 이 후보의 의혹이 다시 불거진다면 최악의 경우 지지율이 폭락할 수 있다. 좌파 정권 종식을 바라는 우파보수 세력에는 다시 11월의 악몽(惡夢)이 되는 셈이다.
악몽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암, 대비해야 하고 말고. 이른바 ‘스페어 후보론’이다. 이회창 씨가 운(韻)을 떼었다. “차일시 피일시(此一時 彼一時·지금은 지금이고 그때는 그때)”라고.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대선 3수(修)를 고려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스페어 후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우파의 힘을 모아 좌파 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한 결단’이라고 한다. 그는 “북의 김정일과 남의 친(親)김정일 세력이 또다시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느냐, 아니면 대한민국 수호세력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느냐의 선택의 기로에 섰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어떤 명분이나 이유로도 이 씨가 대선에 다시 나서는 것은 옳지 않다. 이미 여러 논자(論者)가 그 부당함을 지적했으므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덧붙인다면 그가 여전히 ‘그만의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오른쪽으로 치우친 ‘昌의 窓’
이 씨는 분명 한국 보수 세력이 배출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다. 그로서는 두 번의 대선 패배가 억울할 것이고, 지금의 한나라당 후보보다 자신이 도덕성이나 경륜 면에서 낫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래서 친북좌파 세력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품격 있는 법치국가를 만드는 데 자신의 결단이 요구되며, 이는 결코 개인적 명예회복이나 권력욕의 발로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성과 옳고 그름은 별개의 문제다.
더구나 이제 오른쪽으로 너무 치우친 ‘창(昌)의 창(窓)’으로는 세상을 균형 있게 바라보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일정한 지지자들의 환호에 묻혀 달라진 세상을 보지 못한다면 노욕(老慾)의 남루함만 남을 수 있다. 모쪼록 이회창 씨의 11월이 더는 잔인한 달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전진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