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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원광연]섞임의 미학, 융합의 시대

입력 | 2007-11-03 03:03:00


막이 오르면서 오케스트라 선율이 흐른다. 술렁이던 객석도 완벽한 고요함 속에 빠져 들었다. 무대는 조선시대 어느 봄날, 한가롭기 그지없는 전원 풍경. 춘향과 향단이 춤추며 등장한다. 그런데 우리 전통춤이 아니라 발레다. 조금 지나서 이 도령 등장. 그는 금발의 유럽 사람이다. 의상도 전통적인 한복이 아니라 발레에 맞게 개조된 동양과 서양의 ‘융합형’이다.

예술-학문-방송통신 거대한 조류

지난여름 경기 고양시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발레 ‘춘향’의 광경이다. 춘향전 스토리를 발레라는 서양 무대예술로 변환한 과감한 시도다. 이번 주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도 발레 ‘춘향’이 공연됐다. 한국의 콘텐츠와 서구의 예술 표현 양식이 결합한 고급 문화상품이다. 서로 다른 장르가 합쳐지거나 장르를 넘나드는 사례는 많다. 크로스오버, 퓨전국악, 퓨전재즈, 팝페라 등의 용어는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문화예술에서의 융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오페라는 서구의 시민계급이 탄생하면서 생긴 융합형 예술이다. 그전까지 음악과 시와 춤은 별개였다. 여러 장르를 혼합한 오페라는 악기 발달에 힘입어 당시로는 첨단 융합형 예술로 인식됐다. 산업혁명이 일어나 도시로 인구가 빠르게 유입되면서 이들을 주 대상으로 ‘차세대 첨단 융합형’ 예술이 나왔다. 바로 서커스다.

20세기 중반까지 각광을 받던 서커스는 얼마 전까지 사양길을 걸었다. 사람을 감동시킬 스토리가 없어서다. 최근 캐나다에서 시작한 ‘태양서커스단’이 서커스에 순수 공연예술과 영화적 스토리를 융합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동시에 3개 작품이 공연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20세기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융합형 예술이 영화라면 21세기에는 어떤 융합형 예술이 등장할까? 영화와 비디오게임의 중간 형태가 될 것이라고 전문가는 예측하지만 두고 볼 일이다.

융합은 예술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시대적인 조류이고 사회적 현상이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디지털이라는 기술이 도사리고 있다. 디지털 기술을 빌리면 모든 것이 0과 1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질이 판이한 것이 0과 1로 바뀌면 이들을 서로 합치는 작업이 수월하다.

한 예로 방송통신융합이 있다. TV와 라디오로 대변되는 방송과 전화와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통신은 별개였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유선방송 네트워크를 통해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 방송 네트워크를 통신 용도로도 사용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방송회사가 통신사업에 진출하게 됐다. 반대로 통신 케이블로 TV도 시청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방송과 통신의 충돌이라기보다 융합과 시너지로 승화시키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다른 분야-타인 존중이 밑바탕

학문에서도 융합이 유행이다. 통섭은 평소에 잘 듣기 힘든 단어인데 서로 다른 것을 한데 묶어 새로운 것을 잡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기존의 학문 분야에서 잘 풀리지 않는 문제에 대해 인접한 분야가 서로 소통하고 협력해 새로운 해법을 찾는 시도다. 물리학계에서는 날씨와 여자의 마음은 절대로 예측할 수 없다는 농담이 있다. 역으로 말하면 물리학적으로만 접근하니까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이미 날씨 예측은 물리학과 수학, 전산학의 융합으로 웬만큼 가능하다. 여자의 마음도 통섭에 따라 예측할 날이 올지 모른다.

문화예술 과학기술, 그리고 사회 전반에서 융합은 우리 시대의 키워드이다. 문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우리의 준비가 잘 안 돼 있다는 점이다. 융합은 타 분야에 대한 이해와 타인에 대한 존중을 전제로 한다. 이를 개선하지 않으면 문화예술, 과학기술을 포함해 사회 전반의 발전이 어렵다.

원광연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