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포먼은 빨간색 트렁크를 입고 링에 올랐다. 20년 전 무하마드 알리에게 무참히 KO패를 당할 때 입었던 바로 그 트렁크였다. 당시에는 챔피언이었지만 이번에는 도전자였다.
포먼에게 기대를 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45세에 배가 불뚝 나온 ‘할아버지 복서’ 포먼은 외로운 승부를 벌어야 했다.
1994년 11월 5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MGM그랜드호텔에 마련된 특설 링. 포먼의 상대는 26세의 젊은 챔피언 마이클 무어러였다. 나이와 스피드, 체력 등 모든 면에서 포먼은 불리했다. 대다수 복싱 전문가는 “무어러의 일방적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예상대로였다. 가벼운 몸놀림의 무어러는 육중한 포먼을 상대로 ‘치고 빠지기’ 연습을 하는 것 같았다. 경기 종료 뒤 공개된 채점표도 이를 말해 줬다. 9라운드까지 3명의 심판 모두 무어러의 손을 들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예측이 들어맞은 것은 9라운드까지였다. 10라운드 2분경 포먼의 오른 주먹이 무어러의 턱에 꽂혔다. 무어러는 링에 누워 주심이 10을 셀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빅 조지’(Big George·조지 포먼의 별명)는 1만2000여 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최고령 세계 챔피언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20년 전 알리에게 내줬던 타이틀을 탈환했다.
외신들은 포먼의 승리를 ‘종료 1분을 남기고 넣은 결승골’, ‘18번 홀에서의 홀인원’ 등에 비유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경기 초반 무어러의 무차별 공격에 수비로 일관하다 챔피언의 체력이 떨어진 후반에 한 방을 노린다는 작전이 그대로 적중했다. 아이러니하게도 20년 전 알리에게 당했던 작전으로 무어러를 캔버스에 잠재웠다.’
이 경기 이후에도 포먼에게 알리는 인생의 콤플렉스였던 것 같다. 최근 내놓은 자서전에서는 “누군가가 약을 탄 물을 마셔서 알리에게 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20세기 복싱사의 위대한 ‘두 전설’은 지금 다른 길을 가고 있다. 포먼은 사업가로 변신해 대성공을 거둔 반면 알리는 심한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는 세상이다. 링 위에서도, 링 밖에서도….
차지완 기자 c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