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지인이 보내온 진융(金庸)의 무협소설 의천도룡기(倚天屠龍記)를 잠시 읽었다. ‘당국자미, 방관자청(當局者迷, 傍觀者淸)’이란 말이 거기 나온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미혹에 빠지나, 곁에서 보는 사람은 맑은 정신으로 대세를 읽는다는 뜻이다. 5년 전 대선의 승자와 패자, 노무현 대통령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가 함께 생각났다.
노 대통령이 독선(獨善) 망집(妄執)을 억누르고, 국내외 비판 의견을 반쯤만 새겼더라도 본인과 친노(親盧)그룹의 처지가 지금보단 나을 것이다. 반노(反盧) 이노(異盧·노무현과 다름) 극노(克盧·노무현식 정치 깨기)가 이번 대선의 큰 흐름이 돼 버린 현실 앞에서 후회해 봤자 늦었다.
이 전 총재는 세 번째 출마 여부를 장고(長考) 중이다. 60% 안팎의 민심(民心)이 반대하고, 거의 모든 신문이 부당성을 지적하는데도 끝내 출마한다면 이 또한 ‘미혹에 빠진 것’이라 해야겠다.
대통령병(病)만 고치면 이 전 총재의 입지가 노 대통령보다 훨씬 좋다. 국민 50% 이상의 지지를 받고 있는 한나라당의 창업자급 원로(元老)로서 원칙과 상식 수준의 훈수나 덕담만 가끔 해도 존경 받을 위치다.
極右장사, 승산 없다
10년 전엔 정권 재창출을, 5년 전엔 정권 탈환을 장담하며 한나라당 후보 자리를 수임(受任)했지만 절호의 기회를 살리는 데 연거푸 실패한 그다. 그럼에도 많은 국민은 ‘이회창이 두 번 죄지었다’는 말을 아끼고, 잇단 패배를 위로하며 멋진 원로 역할을 기대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진 못했지만, 경제나 대북(對北) 문제에서 역사적 빚이 무거운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꿀릴 것도 없다.
한나라당의 올해 경선은 과거와 비교해도, 여권(與圈) 경선과 비교해도 훌륭한 선거였지만 이 전 총재는 치하(致賀)에 인색하고 오히려 이 후보를 타박했다. 이 전 총재가 이미 2년간 대선 3수(修)를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는 일부 언론의 보도가 많은 것을 상상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전 총재는 왜 경선에 떳떳하게 나서지 않았을까. 1년 이상의 여론 흐름에 답이 숨어 있다고 추측된다. 한마디로 경선에서 이길 가능성이 없었던 거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핑계를 지어내 탈당 후 출마를 강행한다면 4등도 못된 등외자(等外者)의 경선 불복이다. 경선에 뛰어들었다가 승산이 없자 중도 탈당해 잡탕 신당의 경선에 도전했던 손학규 씨보다 더 기회주의적이다.
이 전 총재 측은 이명박 후보가 네거티브 공세를 못 견딜 거라고 걱정한다. ‘핑계가 좋아 사돈네 집에 간다’(속내는 다르면서 겉으로만 그럴듯한 핑계를 댄다)는 우리 속담이 있고, ‘늑대가 양을 잡아먹을 핑계는 언제나 있다’는 서양 속담도 있다.
요즘도 각종 여론조사의 이 후보 지지율은 55% 안팎이다. 10년 전 이인제 씨가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을 탈당할 때의 이회창 후보 지지율은 7∼11%였다. 이처럼 낮은 지지율에 허덕이던 이회창 후보가 이인제 씨의 독자 출마를 “민주주의 원칙을 부정하는 배반(背反)”이라고 규정했다. 이 전 총재가 과반(過半)의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를 부정하고 독자 출마한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배반이자 자신에 대한 배반이다. 설혹 후보를 바꾸지 않을 수 없는 ‘이변’이 법정시한인 12월 1일 이전에 생기더라도 대안은 박근혜 전 대표다.
이명박 후보와 한나라당의 대북관, 안보관이 애매하다는 것도 그저 핑계다. 맥아더 동상을 쓰러뜨리려는 극좌(極左)가 더 문제이지만, 극우(極右) 장사로 안보가 지켜지는 것도 아니다. 한나라당이 국가 정체성을 부정한 적도 없다. 이 전 총재가 ‘직업적 보수’ 극우 운동권의 궤변을 빌려 출마하더라도 중원 장악에는 필패(必敗)할 수밖에 없다.
이회창 씨, 더 추락할 건가
무엇보다도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은 경제다. 이 전 총재에게 영향을 미치는 한 극우 인사는 “이번 선거의 의미는 좌파세력을 교체해 대한민국을 정상화하는 것”이라며 “대선 후보의 경제 제일주의는 타락”이라고 주장했다. 자유시장경제를 제대로 복원하는 것이야말로 좌파세력 교체의 지름길임을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하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사라져 갈 뿐이다. 그러나 망가져 가는 노병을 지켜보기는 안타깝다. 이 전 총재가 끝내 출마해, 앞의 두 번에 이어 세 번째 ‘죄’를 짓는 모습은 정말 보고 싶지 않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