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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506년 연산군 타계

입력 | 2007-11-06 03:00:00


1506년 11월 6일, 조선 왕조 최초로 신료들에게 쫓겨난 국왕 연산군이 31세의 한창 나이에 강화도에서 쓸쓸히 여생을 마쳤다. 이로써 연산군은 광해군과 함께 ‘군’으로서 불명예 퇴진한 조선의 두 군주 중 한 명으로 기록됐다.

청나라를 상대로 능숙한 외교 감각을 보인 광해군에 대해서는 20세기 들어 ‘자주·실용적’이라며 일부 학자가 역사적 복권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반면, 연산군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시도가 없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폭군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폭군’의 대명사가 된 데에는 미치광이에 가깝게 묘사되는 그의 사생활도 작용했지만 결정적 요인은 5년여 동안 일어난 두 번의 사화였다.

1498년(연산군 4년)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견되면서 벌어진 무오사화와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 책임 문제로 일어난 갑자사화는 부관참시, 존속 살해 등 패륜과 무도함의 극치를 보였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연산군은 ‘시기심이 많고 모진 성품을 가지고 있었으며, 또 자질이 총명하지 못한 위인이어서 문리(文理)에 어둡고 사무능력도 없던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반정 후 기록인 만큼 가감할 필요는 있지만 그가 세종이나 성종과 달리 문신 세력과 극한 갈등관계에 있었던 것을 보면 어느 정도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신들의 직간(直諫)이 부담스러워 신하들과 학문을 논하는 경연 제도를 없애고 사간원·정언 등의 언관도 혁파하거나 감원했으며, 기타 상소와 상언·격고 등 여론과 관련되는 제도들도 모두 중단시켰다. 또한 그는 ‘입은 화(禍)의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라며 신하들에게 ‘신언패(愼言牌)’를 차게 하기도 했다.

광대 공길과 기생 출신 장녹수만이 남아 왕의 곁을 지키는 영화 ‘왕의 남자’의 결말 부분은 바른말 하는 신하들이 모두 떠난 연산군의 처지를 극단적으로 보여 준다. 사냥을 하기 위해 마을을 밀어버린다든가 향락으로 국고를 탕진하는 실정이 거듭되면서 민심은 어지러워졌고 연산군은 성희안, 박원종 등이 주도한 반정으로 물러났다.

전횡을 일삼았던 그의 히스테릭한 성격에 대해 애정 결핍으로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큰 그가 생모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받은 정신적 충격이 상상외로 컸을 거라는 해석이다.

그는 많은 사람을 의심하고 죽였지만 슬하에 7남 1녀를 둔 부인 신 씨와의 금실은 좋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를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을까. 연산군이 죽기 전 남긴 말은 “부인 신 씨가 보고 싶다”(조선왕조실록)였다고 한다.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