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에 실려 오는 국화香에 취하다
깊어가는 가을. 밤길 아파트 화단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짙습니다. 낙엽 뒹구는 거리도 아름답지만 가을밤 풀벌레의 촉촉한 울음소리도 가슴에 다가옵니다.
며칠 전 인터넷 세상에서 국화 밭을 보았습니다. 축구장만 한 땅이 온통 꽃으로 뒤덮였던 지난해 ‘고창국화축제’ 사진이었습니다. 그런데 국화를 보자 꽃보다 사람이 더 그리워졌습니다. 2000년에 타계한 시인 서정주님입니다. 학창 시절에 밑줄쳐 가며 읽고 외우던 교과서 속의 시 ‘국화 옆에서’의 기억. 그것이 저를 시인에게 데려갔습니다.
고창은 서정주 시인의 고향입니다. 육신의 고향일 뿐만 아니라 시작(詩作)의 고향입니다. 고창국화축제의 연유가 그겁니다. 이 가을을 느끼기에 풀벌레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국화꽃의 소담스러운 자태, 향기와 더불어 미당의 시향을 음미하기에 더없이 좋은 시절이니까요.
그날 아침 시인의 고향인 질마재 아래 진마마을(부안면 선운리)에는 잔뜩 흐린 채 빗방울까지 흩뿌렸습니다. 질마재는 곰소만의 갯마을 선운리와 오산리를 잇는, 마을 뒤편 소요산 중허리의 제법 높은 고개로 고창으로 질러가자면 넘는 고개입니다.
시인의 생가는 몇 년 전 복원됐습니다. 초옥 두 채와 우물, 울타리 삼아 심은 동백나무와 노란 국화, 평상에 누워 잠든 어린이 모습의 조형이 전부입니다. ‘미당 시문학관’은 집 앞의 도랑을 건너 200m쯤 가면 나오는 폐교에 있습니다. 옛 교사에 이어 붙여 지은 6층 높이 콘크리트 건물에는 그분의 시와 시집, 유품과 사진, 흉상 등이 전시돼 있습니다.
옥상은 질마재 전망대라 할 만합니다. 가까이로 생가는 물론 멀지 않은 안현마을 언덕 위의 미당 내외 묘소와 한때 군산 다음가는 큰 포구였던 줄포, 멀리로 곰소만과 바다 건너 변산반도 산마루가 훤히 바라다 보입니다.
그날 우연히 예서 시인의 친동생 서정태(84·시인) 씨를 뵈었습니다. 61년 전 자신이 입사한 신문사의 당시 선후배 이름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하는 그분과 대화 중에 ‘국화 옆에서’가 발표(1947년)된 사연도 들었습니다. 시작 장소는 서울 마포구 공덕동 301의 ‘청수당’(미당이 집에 붙인 옥호)이고 그 시가 경향신문에 발표된 것은 가까이 지냈던 소설가 김동리(당시 경향신문 문화부장) 씨 덕분이라고 합니다.
질마재를 뒤로 하고 국화꽃을 보러 고창읍으로 향했습니다. 질마재 마을에서 국도(22호선)를 타자면 바닷물이 들락거리는 개천둑길을 지나는데 이 물이 바로 고창을 장어구이의 명소로 등극시킨 그 풍천입니다.
그 풍천을 따르다 보면 선운사로 이어지는 삼거리(국도 22호선)가 나옵니다. 여기가 삼인리, 풍천장어 식당이 집결한 곳입니다. 선운사 앞에는 미당의 시비가 있습니다. ‘선운사 동구(洞口)’라는 시인데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리 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라고 적은 시입니다.
질마재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뒤처리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갈 참으로 선운사 동구의 버스정류장을 향해 혼자 걷던 그날, 시인도 저처럼 늦가을의 가느다란 이슬비를 만난 모양입니다. ‘굴풋하고 출출한 데다 너무 허전하여 길옆의 주막인 듯한 집을 찾아 들어가’ 한 사십쯤 먹은 여인에게 음식을 시키고 마침 뜯지 않은 꽃 술 한 도가니를 꺼내 이 중년의 안주인과 마신게지요. ‘도가니의 술이 줄면서 둘은 무슨 전생의 애인이나 오랜만에 만난 것 같은 느낌’속에 노래도 주고받았나 봅니다. 그리고 종내 그 수작(酬酌)을 파하고 아쉽게 헤어지는데 총총히 떠나는 시인의 등 뒤에서 여인은 ‘동백꽃이나 피건 또 오시요인이…’라는 말을 남깁니다.(자서전 기록)
그 후 스물 몇 해 만에 이곳을 다시 찾건만 ‘그 주막은 하늘로 날아갔는지 온데간데없고 그 집이 있던 빈터엔 실파만 자욱이 나서 자라고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사연인즉 6·25전쟁 때 공산당의 파르티잔(빨치산)이 몰려와 집을 불 지르고 안주인은 끌어내다가 죽여 버렸다고 합니다. ‘이 빈 집터와, 거기 돋은 실파와, 그 근처의 동백꽃을 보는 눈에는 그 여인은 그런 것들에 노래 부르며 들어 있을 걸로만 느껴졌다’고 자서전에 적은 시인의 심경. 이 시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듯합니다.
고창국화축제가 열리는 곳은 석정온천이 있는 고창읍(석정리)입니다. 구릉의 산기슭까지 포함해 99만 m2의 평지와 언덕이 몽땅 국화 밭으로 꾸며져 꽃동산을 이룹니다. 그러나 실제 가보시면 꽃동산의 화려한 풍치도 좋지만 가을바람에 실려 오는 상큼한 국화꽃 향기에 취하는 기분이 더 좋습니다. 개막은 지난달 18일에 했습니다만 잦은 비로 개화가 늦어 피크는 다음 주말(17, 18일)이 될 듯합니다. 동춘서커스도 게서 천막공연을 펼치고 있습니다.
해질녘에는 해변(동호해수욕장)을 찾았습니다. 구시포까지 펼쳐진 ‘명사십리’라는 멋진 해변인데요, 해변 뒤 사구로는 해안도로도 나 있어 멋진 풍광을 차 안에서도 즐길 수 있습니다.
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촬영: 조성하 기자
▼ 여행정보▼
◇고창 ▽미당 시문학관(생가) △찾아가기=서해안고속도로∼선운산나들목∼국도 22호선∼군도 16호선∼질마재 ▽고창국화축제 △찾아가기=서해안고속도로∼고창나들목∼군도 15호선∼석정온천 △홈페이지=www.고창국화축제.com △기간=18일까지 △입장료=무료 △전화=063-564-9779 ▽동춘서커스=입장료 1만 원(어린이 5000원)
▽맛 집 △진명식당(주인 이종두 황옥자)=청국장 혹은 김치찌개, 시래기 국을 겸해 백반과 아침거리로 콩나물해장국(4000원·사진)을 내는 전형적인 밥집. 개점은 오전 6시 30분. 고창전화국 옆 길가. 063-561-5478 △장어식당 ‘바다마을’=즉석 장어구이 3만 원(1kg 네 마리·2인분). 동호해수욕장(해리면 동호리 622)에 위치. 063-564-70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