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이회창 씨의 대선 출마설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무렵 필자는 그를 인터뷰해 신동아 12월호에 게재했다. 숭례문 근처 단암빌딩 사무실에서 오전 10시에 시작해 식당에서 배달한 점심을 먹으며 인터뷰를 이어 갔다.
그는 어제 재출마를 굳힌 계기에 대해 “한나라당 경선 과정과 그 이후 일어난 일들을 보며 결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1년 전 신동아 인터뷰에서 벌써 “6·25 이래 제2의 국난을 맞아 구렁텅이에 빠져 드는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며 “이것을 정치 활동의 재개로 본다면 그렇게 봐도 좋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적어도 1년 전 3수(修) 결심을 굳히고 공표 시기를 저울질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필자에게 세 가지 사안에 관해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를 요청했다. 오프 더 레코드의 형식이 약간 변칙이었지만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였다. 기자와 뉴스원(源)의 신사협정은 존중돼야 한다는 생각에 신동아 인터뷰 기사에서는 약속을 지켰다. 그로부터 1년이 흐른 지금 이 씨는 무한 검증을 받아야 하는 대선 후보로 다시 나섰다. 1년 전 필자가 받아들였던 오프 더 레코드는 이제 효력을 유지하기 어렵게 됐다.
두 아들 軍미필 ‘안보 대통령’의 모순
하나는 영화배우 심은하 씨의 남편인 지상욱 박사가 보좌역으로 일하고 있는 것을 쓰지 말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런데 이 씨의 출마 선언 이후 지 박사는 측근으로 빈번하게 신문에 등장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이 씨가 그즈음 언론인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에 관한 문답이었다. 이 두 개의 오프 더 레코드는 당시나 지금이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었고, 이 씨가 민감하게 여긴 내용은 두 아들의 병역에 관한 것이었다. 필자가 던진 질문은 이런 요지였다.
“김대업 병풍은 조작된 게 맞습니다. 검찰이 2002년 대통령 선거 전에 중간수사 결과 발표를 통해 김대업 병풍은 가짜라고 이 후보의 손을 들어 줬지요. 그런데 습기가 없으면 곰팡이가 피지 않습니다. 김대업 병풍이 가짜로 판명됐다고 해서 두 아들이 체중 미달로 군대 안 간 것까지 클리어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씨는 굳은 표정으로 간단하게 답했다. “아들 둘이 군대 안 간 것에 대해서는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가 필자에게 오프 더 레코드를 요청한 이유는 답변이 아니라 고약한 질문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의 인터뷰를 통해 “구국(救國)의 길에 나서겠다”는 선언을 하는 마당에 두 아들의 병역 미필을 상기시키는 기사가 한 줄이라도 나가는 것이 싫었을 터이다.
필자가 군에 입대한 1970년대에 군대 가기 싫은 젊은이들 중에는 체중을 상한선 초과 또는 하한선 미달로 만들려고 시도한 경우가 있었지만 대학생은 통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사지(四肢)가 제대로 붙어 있는 대학생은 반드시 소집해 전방 근무를 시키라는 엄명을 내렸다. 대학생이 역차별을 받던 신체검사 제도는 전쟁 후 베이비 부머 세대가 성년이 돼 병역자원이 남아돌고 고학력 사회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이 씨의 두 아들도 박 대통령 시대였더라면 체중만으로는 군대를 면제받기 어려웠을 것이다.
지난 두 번 대선에서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KS(경기고-서울대 법대) 출신 법조계 후배들이 최근 이 씨를 찾아가 “출마는 꿈도 꾸지 마시라”고 진언하자 그가 노여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고위 법관을 지낸 KS 후배는 이 말을 전해 주면서 “이번 출마는 정치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코미디”라고 말했다. 그는 “김대업 사건은 두 아들의 병역 미필 과정에 불법이 개입된 증거를 갖고 있다는 김 씨의 주장이 거짓말로 드러난 거죠. 그런데 합법적인 다이어트를 했다면 괜찮은 건가요”라고 반문했다. 그는 “두 아들의 병역 문제와 이번 출마를 보더라도 이 선배의 대쪽 이미지는 허상(虛像)”이라며 한때 존경하던 선배의 ‘안티’로 바뀌어 있었다.
KS 후배 “대쪽 이미지는 虛像”
이 씨는 두 아들의 병역 문제에 대해 두 번 대선을 통해 충분히 심판받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국가안보 무임승차’ 같은 검증 사안은 시효도 없고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의 원칙도 적용되지 않는다. 그가 ‘안보와 국가 정체성’을 변칙 재출마의 명분으로 내세우고 있어 더욱 그렇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