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있었던 1919년 봄, 인도의 잘리안왈라 공원에선 비폭력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학살이 벌어졌다. 영국군의 갑작스러운 총격에 산책 나온 주민들은 우물로 뛰어들었고 인파에 휩쓸려 압사한 사람도 수두룩했다. 4000여 명이 희생된 비극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위대한 지도자 한 사람을 낳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상류층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투사의 길로 들어선 청년이 있었다.
자와할랄 네루. 1889년 11월 14일 인도 카슈미르의 부유한 브라만가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17세에 영국으로 유학해 케임브리지대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 자격증을 따서 돌아왔다.
전형적인 ‘친영 엘리트’로 성장할 수 있었던 네루는 ‘잘리안왈라 사건’을 보며 영국식 정의에 대한 신뢰를 접고 간디가 주도하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네루는 “억압받는 계층과 자신을 동일시한 위인”이라며 간디를 존경했다. 점진적이고 평화적 투쟁을 추구하는 간디와 달리 네루는 혁명적 사회개혁을 주장하며 종종 의견이 충돌했지만 서로의 장점을 포용하며 인도 독립을 함께 이끌었다.
“이제 자정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세계는 잠이 들지만 인도는 자유와 함께 깨어납니다. 이제 우리의 임무는 빈곤과 무지, 불평등을 종식시켜 모든 이의 눈에서 눈물을 지우는 것입니다.” 독립을 하루 앞둔 1947년 8월 14일 밤. 인도 최대 민중정당 국민회의의 총재 네루는 제헌의회에서 이같이 연설했다.
인도 연방공화국의 초대 총리에 오른 네루는 17년간 재임하며 보통선거제를 도입하는 등 민주주의 정착에 기여했다. 반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하는 인도식 ‘혼합경제’는 국민을 빈곤과 무지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실패해 ‘배고픈 민주주의’에 그쳤다는 평가도 많았다.
하지만 네루를 향한 인도인들의 지지는 1964년 그가 사망한 뒤에도 계속됐다. 딸 인디라 간디와 외손자 라지브 간디 등 3대에 걸쳐 총리를 배출한 네루 가문은 인도 헌정사 60년 중 38년을 통치했다.
네루가 옥중에서 편지로 역사를 가르칠 만큼 아꼈던 외동딸 인디라 간디는 1984년 10월 시크교도였던 자신의 경호원에 의해 암살됐다. 당시 총리였던 간디가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시크교도들을 무력 진압한 데 따른 보복이었다. 간디는 시크교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황금사원을 초토화시켰고 4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공교롭게도 그 황금사원 옆엔 65년 전 네루를 독립투사의 길로 이끈 잘리안왈라 공원이 있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