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말기 중국을 지배한 서태후(1835∼1908)는 ‘권력욕의 화신’이었다.
1861년 자신의 다섯 살 난 아들 재순이 황제(동치제)에 오르자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작해 무려 3번이나 이를 이어가며 47년간 집권했다. 그의 권력욕이 황제들의 수명을 단축시켰다고 후세의 역사가들이 평가할 정도였다.
동치제 즉위 후 표면적으로는 황후(동태후)와 함께 수렴청정에 나섰지만 동태후는 서태후에 대항할 뜻도 능력도 없는 인물이었다. ‘대권’을 잡은 서태후는 50세가 되던 1885년에는 해군 부대의 예산까지 빼돌려 별궁 ‘이화원’을 짓는 등 사치를 부렸다.
그가 자신의 권력만을 탐하던 당시 나라 안팎은 어지러웠다. 아편전쟁(1840∼1842년) 이후 기아로 허덕이는 농민이 늘었고 서구 열강의 유린도 날로 심해지던 때였다.
서태후는 짧은 기간에 ‘입신양명’을 한 여자다. 만주족 중급 관리의 4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난 서태후는 17세인 1852년에 함풍제의 후궁으로 궁궐에 들어갔다. 175cm의 당당한 체격과 사람을 압도하는 자태를 갖춘 그는 나약했던 함풍제의 관심을 끌었다. 후궁이 된 지 4년 만에 낳은 재순은 26세의 그녀에게 권력을 안겼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휘둘린 동치제는 결국 19세에 요절한다. 서태후를 잘 따르는 여자를 황비로 맞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네 살 난 조카 재첨을 황제(광서제)에 앉히고 2차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광서제가 19세에 결혼을 하자 친정(親政)을 허락했지만 실권을 놓지는 않았다. 더 큰 욕심을 부르는 권력의 속성은 유효했다. 젊은 지식인들의 개혁운동인 무술변법(戊戌變法)으로 권력이 광서제로 기울 조짐이 보이자 서태후는 1898년 다시 수렴청정에 나선다.
권력을 위해 ‘동지’를 제거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함풍제가 죽은 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을 때 공을 세운 공친왕 혁흔을 축출했고, 당시 그에게 협력했던 동태후도 결국 죽음으로 내몰았다.
집요하게 권력을 유지한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 날인 1908년 11월 15일 73세로 생을 마친다. 죽기 직전 광서제의 세 살 된 조카 푸이(중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를 후계자로 지목했다. 마지막 순간에도 4차 수렴청정을 노렸을까.
최근 중국에서 그의 사치와 무능에 대한 재평가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만 권력욕에 대한 다른 평가는 없는 듯하다. 권력 앞에서는 자식도 동지도 없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