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트로이의 여인
전쟁에 짓밟힌 슬픈 운명
나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트로이를 보∼러 왔다/내 손으로 쌓아 올린/아∼름다운 성벽들이/우르르르르르∼ 무너진다∼.
자진모리장단에 맞춰 고대 그리스 서사시가 판소리로 흘러나온다.
14일 서울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오르는 연극 ‘트로이의 여인들’은 여러 가지로 독특한 작품이다.
전쟁 후 그리스 군에 짓밟히는 트로이 여인들의 슬픈 운명을 다룬 고대 그리스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트로이의 여인들’에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 위안부로 동원된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를 녹여 하나의 작품으로 풀어냈다. 구 유고연방 출신으로 유고 내전을 피해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여성 연출가인 아이다 카리치 씨가 국내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다.
10대에 내전을 겪고 군홧발에 짓밟히는 여성들을 목격한 연출자는 프랑스 소설가 쥘리에트 모리요 씨가 한국 위안부의 실상을 고발한 소설 ‘상하이의 붉은 난초-김상미의 운명’을 읽고 작품 구상에 나섰다. 2006년에는 위안부 여성들의 거처인 ‘나눔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했고 이를 바탕으로 연극을 만들었다.
이미 내한 전 5월 한국 배우들을 이끌고 ‘빈 페스티벌’에 참가해 “다국적 팀이 믿지 못할 만큼 깊은 놀라움에 빠져들게 했다(오스트리아 일간지 빈 차이퉁)” “빈 페스티벌의 훌륭한 시작이다(오스트리아 일간지 데어 슈탄다르트)” 등 유럽 평단의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무대는 거칠다. 어두컴컴한 무대 위에 별다른 소품 없이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연상시키는 레몬 빛깔의 조명은 관객의 눈을 강하게 쏘아댄다. 그 위에서 여인들이 때로는 상반신이 벗겨진 채, 때로는 온몸에 피를 묻힌 채 절규와 탄식을 쏟아 낸다.
극은 트로이의 왕비이자 용사 헥토르의 어머니인 헤큐바의 절규로 시작한다. “이제 트로이는 사라졌어… 운명의 파도를 따라 흘러가는 거야.” 헤큐바의 대사가 끝나자마자 낡은 저고리 차림의 여인이 나타나 “내 이름은 강덕경이에요. 1929년 2월 경상도 진주에서 태어났어요”라며 위안부로 가게 된 기구한 사연을 들려준다. 공연은 이렇게 트로이와 위안부 여인이 교차로 나타나 자신들의 불행한 운명의 진행 과정을 당시 상황 재현과 함께 생생하게 들려준다.
카리치 씨는 “전쟁에서 고통당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시공은 다르지만 전쟁에 지고 군인들에게 짓밟히는 트로이의 여성들과 일본군에게 끌려간 한국 위안부 여성들은 공통적 속성이 있다”고 말했다.
작품에는 한국적 요소가 많다. 음악도 판소리, 대금, 가야금, 징 등이 사용됐으며 흰 포목을 찢으며 내적 고통과 승화를 형상화하는 안무도 한국적이다. 같은 비중으로 등장하는 트로이(그리스)의 문화적 요소는 찾아볼 수 없다. 이에 대해 연출 카리치 씨는 “이것은 한국 여성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며 “트로이는 애초 관객으로 설정한 서구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한 장치”라고 말했다.
여성과 정치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많은 카리치 씨의 다음 작품은 백년전쟁의 영웅이지만 모함으로 억울하게 죽은 잔다르크와 비운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다. 12월 2일까지. 1만5000∼3만5000원. 02-580-1300
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