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보며 다니는 세계 여행 8개월째.
드디어 100% 공연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게 됐다. 그새 외국어를 완전정복했느냐고? 그럴 리가.
의성어 의태어만으로 이루어진 ‘판토마임’ 축제를 찾아왔다.
스페인 바로셀로나에서 기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찾아 온 레우스(Reus)는 우리의 춘천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작지만 예술이 넘치고 사람들은 정이 오갔다.
이곳 사람들이 어찌나 친절한지 역이나 광장에서 누군가에게 뭘 묻기라도 하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일단 다 모여들기부터 한다.
내가 물은 건 “인포메이션 센터가 어디냐?”였을 뿐인데,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던 어르신들까지 죄다 모여, 거의 회의를 하다시피 했다. 》
○가족단위 관객들이 절반 이상 차지
그렇게 3∼4분을 자기네들끼리 뭐라 뭐라 떠들더니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내게 말을 건넸다. “어디 찾는다고?” 터지는 한숨과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웃으니 이들도 함께 한바탕 따라 웃었다.
레우스 국제마임축제(Reus International Mime Festival)는 올해로 10년째를 맞는 축제지만 ‘국제’라는 단어가 무색할 만큼 규모가 작고 알려지지 않았다.
성장이 멈춘 듯한 축제지만, 레우스 마임축제는 스페인의 저력을 새삼 느끼게 할 만큼 출중한 연기파들이 많았다. 모든 행위예술의 기본은 역시 마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무대세트와 메이크업, 의상에 가려져 본 실력을 가늠할 수 없던 연기자라도 마임에서만큼은 진짜 연기 실력이 드러나기 마련이니까.
마임 공연은 어린아이와 노인 등 가족들이 오순도순 모여 부담 없이 문화생활을 즐기기에도 최고였다. 거리나 공연장에는 절반 이상이 가족 단위 관객들이었다. 몸짓 손짓만으로 표현하는 마임 공연이다 보니 어린 아기들까지 까르르 웃는 소리가 공연 내내 그칠 줄 몰랐다. 무엇보다 이 축제의 맛은 사람들 속에 섞여 개미군단처럼 몰려다니는 재미였다. 세계 각국의 축제를 돌아다니다 보니 축제의 시간 편성을 눈여겨보게 됐는데, 내가 보기엔 크게 4가지로 나뉠 수 있었다.
첫째는 축제 기간을 1∼3개월씩 월 단위로 길게 잡고 특정 요일에만 공연을 하는 경우다(가령 매주 목요일 밤에만 축제를 열어 집중도를 높이는 식이다). 둘째는 같은 조건이지만 평일이 아닌 주말만 공연을 편성하는 거다(주5일 근무제가 실시된 지 얼마 안 된 한국에서 응용해 도입해도 좋을 방법 같다). 셋째는 요일과 상관없이 관객이 많이 들 수 있는 같은 시간대에 여러 프로그램을 편성해 관객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주거나 관객을 여러 공연에 분산시키는 방법이다. 마지막이 바로 개미군단 방법인데, 공연 시간이 겹치지 않게 한 작품씩 순서대로 편성하는 방법이다.
○인간 개미줄만 따라가면 공연 또 공연
레우스 마임축제의 경우, 하루 6편의 작품을 순서대로 편성했기 때문에 관객들은 한 공연이 끝나면 삼삼오오 다음 공연장으로 줄을 지어 옮겨간다. 먹이를 나르는 개미군단처럼 말이다. 나와 같은 관광객은 애써 지도를 보고 찾아갈 필요도 없다. 인간 개미 줄만 따라가면 공연이 있으니까. 올해는 페루 마임팀의 ‘마놀로지아스(Manologias)’라는 공연이 가장 입장 경쟁이 치열했다. 200석 규모의 좌석이 금세 차서 나를 포함한 60여 명이 그냥 돌아서야 했는데, 다행히 유일한 동양인에다가 갖은 약한 척(?)을 했더니 특별히 나만 들여보내 주었다(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콜록거리며 아픈데도 왔다는 감기 마임 연기를 했더니 신기하게 잘 통했다).
세 명의 마임 연기자가 등장하는 이 공연에서 한 대머리 마임 연기자의 머리를 놓고 다른 두 배우가 숨어 동그랗게 말린 귀족 머리, 로커의 흩날리는 긴머리, 공작새 같은 히피족 머리를 손짓만으로 순발력 있게 표현했는데 보이지 않는 ‘헤어 스타일’을 마치 눈앞에서 생생히 만들어내는 이들의 연기에 관객들은 박장대소했다.
다음 날, 이번 축제 중 유일하게 유료로 공연됐던 스페인팀의 ‘더 베스트(The Best)’라는 공연은 꼭 ‘서수남-하청일 쇼’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찰떡 궁합 같은 두 콤비는 어리숙한 듯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 어정쩡한 걸음으로 객석을 누비며 두 사나이의 여정을 코믹한 마임으로 표현했다. 어눌한 동작 하나하나에 웃음을 참지 못하는 관객에게 다가가 ‘아줌마 뭐 이 정도 갖고 그렇게 정신 못 차리고 웃는 거야∼!’라는 의미로 어깨를 툭 때리면, 관객도 배우의 어깨를 같이 때리며 또 웃었다. 공연을 관람한다기보다는 서로 정을 쌓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축제가 진행되던 닷새 내내 나는 진심으로 마음속 깊이 바랐다. 정겨운 동네잔치 같은 이들의 축제가 앞으로 더 커지지 말고 계속 이렇게 소박한 모습으로 유지되기를….
유경숙 공연기획자 prniki1220@hotmail.com
■ 개그 클래식 공연 현장
연기를 잘하는 연주자라고 소개해야 할까, 아니면 연주를 잘하는 연기자라고 해야 할까. 배꼽을 움켜쥐고 클래식 공연 관람하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토록 친근하고 화음 넘치는 개그도 처음이었다.
촐싹대는 마에스트로, 동물소리에 능한 바이올리니스트, 파바로티를 닮은 율동 넘치는 첼리스트, 노래 부르는 바이올리니스트. 이번 마임 페스티벌에서 우연히 보게 된 ‘개그 클래식 공연’(정식 제목은 스페인 지방어로 써 있어 알 수 없었다)은 4명의 연주자(혹은 마임연기자)들의 뛰어난 연기와 연주 실력으로 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율동과 퍼포먼스를 고루 섞은 이들의 엉뚱한 행동에 박장대소하다가도 중간 중간 프로그램북을 뒤져 이들이 연주하는 아름다운 곡이 무엇인지 곡명을 찾아 확인해볼 만큼 연주 실력도 뛰어났다.
연주 도중 ‘삑사리’ 내는 단원을 찾아내는 오케스트라의 상황을 코믹한 마임을 곁들여 묘사한다거나 우아하게 클래식 곡을 연습하던 단원들이 마에스트로만 사라지면 순식간에 바이올린을 가랑이 사이에 끼고 말 타는 흉내를 내는 등 관객들의 배꼽을 잡게 했다.
촐싹대고 깡총깡총 뛰던 마에스트로는 라면 면발보다 더 뽀글뽀글한 자신의 파마머리 몇 가닥을 길게 늘여서 잡더니 거기에 바이올린 활을 갖다대고 간단한 멜로디를 연주하는 거였다. 관객들은 이 마술 같은 머리카락 연주에 신기해하며 마에스트로의 라면 머리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남녀노소 가족단위 관객들이 연방 웃음을 지으며 연주를 감상하는 걸 보면서 갑자기 어릴 적 엄마가 만들어 주셨던 볶음밥 생각이 났다. 시금치를 먹지 않던 나를 위해 시금치와 각종 야채를 아주 잘게 넣어 만들어준 그 볶음밥처럼, 어렵고 지루할 것만 같던 클래식 음악을 관객들은 정말 맛있게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