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의 명운(命運)을 가를 BBK 주가 조작범 김경준 씨가 대선을 33일 앞두고 돌아왔다. 그는 주가 조작과 회사 돈 384억 원 횡령 혐의로 구속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예감한 듯 영장 실질심사도 포기했다. 그가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에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왠지 음모의 냄새가 났다.
김 씨가 야당 출신 서울시장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왜 검찰에 고발하지 않고 미국으로 달아났을까. 3년 반 동안 미국에서 구치소 생활을 자청하다 왜 이 시점에 돌아왔는지 잘 설명이 안 된다. 김 씨 주장의 진위는 검찰에서 가려질 것이다. 그러나 검찰 수사 결과와 관계없이 그는 지금까지 행태만으로도 ‘제2의 김대업’으로 의심받을 만하다.
김 씨의 서울 도착 뉴스를 보면서 20년 전 장면이 떠올랐다. 1987년 12월 16일 대선 투표 개시 17시간 전에 대한항공(KAL)기 폭파범 김현희가 비행기 트랩을 내려오던 모습이다. 전두환 정권은 북한의 테러로 115명의 국민이 희생된 비극이 발생하자 이를 치밀하게 이용해 대선 승리의 불쏘시개로 삼았다.
지금, 지지율 답보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범여권은 김 씨가 메시아라도 되는 듯 반긴다.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는 “주가 조작, 자금 세탁 및 횡령, 사기 혐의가 벗겨지지 않은 후보자가 대통령이 된다면 국민의 자존심은 어떻게 되겠는가”라며 이명박 후보의 사퇴를 요구했다.
대선 3수에 나선 이회창 씨 측의 강삼재 전략기획팀장은 보도자료까지 내며 이명박 후보의 사퇴를 촉구했다. 이회창 씨는 “조금 지나쳤다. 다른 대선 후보의 사퇴를 거론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으나 강 팀장과 역할 분담을 한 인상을 준다. 캠프 내의 팽팽한 분위기를 보면 흑색선전의 피해자인 이 씨가 김경준 씨의 ‘한 방’을 기대하고 출마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여권의 외곽 단체들도 본격 활동을 시작했다. KBS는 김 씨가 이 후보와의 ‘이면합의서’라고 주장했다는, 검증도 안 된 문서 사본까지 보여 주며 거들고 나섰다. 김 씨는 여권(旅券)과 법인설립 인가서, 펀드 운용보고서까지 위·변조한 사람이다.
대선 때마다 왜 비슷한 드라마가 반복될까. 왜 우리는 그 드라마에 속는가. 과거 잘못을 법적 정치적으로 정리하고 교훈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선 2연패를 당하고서도 백서 하나 내지 않은 한나라당은 한심하다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지난 10년 동안 흑색선전의 문제를 공론화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자성해야 한다. 학계에서도 대선 과정에서의 흑색선전을 제대로 다룬 변변한 논문이 나오지 않고 있다. 흑색선전의 공범으로 권력화한 시민단체들한테야 뭘 기대할 수 있겠는가.
이명박 후보는 5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대통령이 되더라도 BBK와 관련된 문제가 있다면 직을 걸고 책임지겠다”고 약속했다. 당연한 말이다.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의혹이 거짓으로 밝혀지면 무책임한 의혹을 제기하고 확산시킨 정당과 정치인, 그리고 정치단체들과 언론도 정치적 법적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한다. 선거만 끝나면 모두 망각의 늪에 빠져 버리니 선거 때마다 조작과 흑색선전이 판을 치는 폐단이 그치지 않는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