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황제도 미국 대통령도 엘비스도 타던 그 차, 그 느낌…
10년 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의 일이다. 카지노가 밀집한 스트립에서 자동차로 40분 거리의 북쪽 주립공원인 레드록캐니언이라는 커다란 산악의 공터에서였다. 너른 바위지대에서 야유회를 즐기던 한 무리의 사람들 때문에 모두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 30여 명 되었을까, 모두가 하나같이 엘비스 프레슬리로 분장을 하고 있었다. 뚱뚱한 엘비스, 늙은 엘비스, 여자 엘비스 등 이렇듯 다양한 엘비스가 한자리에 모인 것을 보는 건 그 자체가 즐거움이고 쇼였다. 이들은 ‘엘비스 어소시에이션’이라고 불리는, 엘비스 흉내 내기를 직업으로 하는 단체의 회원이었다.
그날 ‘핑크캐디’(핑크빛의 1959년형 캐딜락 엘도라도)는 가짜 엘비스 협회의 야유회 모임에도 어김없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로 생전에 엘비스가 핑크캐디를 애용했는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라스베이거스에서만큼은 가짜 엘비스가 거리에 등장할 때마다 이 핑크캐디가 그 뒤를 따르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는 ‘엘비스=핑크캐디’의 이미지가 각인된 지 오래다.
그래서 지금도 엘비스의 노래를 들으면 기타를 메고 한쪽 다리를 흔들며 껄렁하게 노래 부르는 그의 생전 모습에 핑크캐디가 오버랩되어 떠오른다.
그런 추억을 추렴해 보면 내게 캐딜락은 그냥 단순한 자동차가 아니었다. 그 자체가 상징이요 문화요 그리고 추억이다. 그런 캐딜락에 관한 한 내게, 아니 우리에게도 일화는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초중등학생 시절을 보낸 이라면 한 번쯤 경험했을 만한 일이다. 수업도 중단하고 대통령 행차에 불려나가 몇 시간씩 길가에 서서 기다리다가 갑자기 휑하고 나타나 쏜살같이 사라지는 수많은 검은색 차량의 모터케이드를 향해 손을 흔들어야 했던 학생 동원 행사가 그것.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대통령이 탑승했던 차량이 이 캐딜락(플릿우드 68 리무진 모델)이었다.
GM의 캐딜락이야말로 스포츠카 코르벳과 더불어 가장 미국적인 자동차가 아닐까. 한 달간 미국을 낡은 미니 밴으로 남북, 동서로 1만6000km나 종횡무진 누빈 때가 있었는데 당시 가장 부러웠던 것은 멋진 올드모델 캐딜락을 느긋한 자세로 운전하며 여행하던 미국인 노부부의 모습이었다. 그 광대한 자연을 무대로 달리는 미국의 프리웨이에서 캐딜락만큼 잘 어울리는 차는 없었으니까.
그런 미국적 아름다움 때문일까. 1953년산 엘도라도를 애용했던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을 필두로 로널드 레이건과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대통령까지 이들은 모두 전용차로 캐딜락을 선택했다. 그런데 그 전통이 한때나마 한국, 아니 한 세기쯤 전의 조선에서도 시작됐다니 조금은 놀랄 일이다. 주인공은 순종(1874∼1926)의 어차였던 캐딜락 리무진이다. 그 차는 용케도 잘 보존되어 지난달 28일 서울 창덕궁에서 경복궁까지 이어진 순종의 어차행진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캐딜락하면 트렁크 양편을 비행기 꼬리날개 모습으로 장식한 ‘테일 핀(Tail-fin)’ 디자인의 램프가 트레이드마크 아닐까 싶다. 이 세기적인 디자인은 1948년 시리즈60 스페셜 모델부터 적용됐는데 그 원전이 P-38 중무장전투기(동체 하나에 꼬리날개가 2개 달린 미 육군의 전투기)였다니 무척이나 기발한 발상이다. 당시 비행기란 20세기 기술력의 새로운 총아였고 그 진보적 이미지를 자동차에 도입한 GM의 당시 선택은 시대를 리드한다는 자부심의 상징이었음에 틀림없다.
그 테일 핀 디자인을 지금 생산되는 캐딜락에서는 볼 수 없다. 그래도 섭섭해할 이유는 없다. 21세기 스타일로 리노베이션되어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는 매력덩어리로 등장한 때문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라. 그 테일 핀의 DNA가 선과 면으로 구성된 캐딜락 이미지에 그대로 살아있음을 보게 될 테니. 캐딜락의 식스틴 콘셉트 카에 처음 적용된 이 새 디자인의 프론트 그릴은 에스컬레이드(GM의 SUV)에 이어 2008년형 뉴STS에도 채용됐다. 가문에 광영을 가져온 그 디자인을 캐딜락은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캐딜락을 손에 넣자 미국 텍사스 주의 프리웨이가 생각났다. 새벽별을 보고 진입한 프리웨이에서 맞았던 광활한 대지의 일출, 더불어 끝없이 펼쳐진 프리웨이의 한 점이 되어 달리던 그 멋진 드라이빙 기억이 당시 가장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캐딜락을 보자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나 여기는 한국, 그런 길은 이곳에 없다.
대신 드림 카의 감동을 되살릴 곳으로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와 호암미술관의 호젓한 낙엽 길을 선택했다. 이 길은 내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로 생각하는 곳. 호암 이병철(삼성그룹 창업자) 선생이 생전에 수집한 1800여 점의 한국미술품을 전시 보존하기 위해 지은 호암미술관과 테마파크인 에버랜드를 아우른다.
미술관 앞 호암 호반 가로수 아래 돌장승을 세우고 바닥에는 나무토막까지 깔아 운치를 더한 산책로 ‘석인의 길’도 좋고 호암미술관 정면에 꾸민 한국정원 ‘희원’(2만여 평)의 아늑한 조경도 기막히다. 봄이면 이곳은 벚꽃으로 뒤덮여 꽃동산을 방불케 하고 지금 같은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과 빨간 단풍잎으로 단장되어 멋진 바리톤 음색의 그윽한 만추지정을 풍겨낸다.
바람 한 점에 은행잎 하나. 가을의 시계는 그렇듯 소리 없이 돌아가고 그 황금 잎 사이로 떨어지는 따뜻한 가을볕 아래로 미끄러지는 캐딜락 뉴 STS의 바퀴구름은 정중동의 미려함이 돋보인다. 중후 미려한 미국의 세단 캐딜락이 어울리는 한국의 가을 풍경. 에버랜드와 호암미술관의 은행잎, 단풍잎 길만 한 곳이 또 있을지. 02-3408-6222, 080-011-6222
용인=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호암미술관&에버랜드 낙엽 길
▽찾아가기= 영동고속도로∼마성 나들목∼에버랜드∼호암미술관 ▽호암미술관(희원) △개관: 오전 10시∼오후 6시(월요일과 추석 설날 연휴 및 1월 1일은 쉼) △입장료: 4000원(학생 3000원) △무료셔틀버스: 에버랜드 정문에서 매시 정각(오전10 시∼오후 4시·정오만 제외) 출발 △문의: www.hoammuseum.org 031-320-1801, 2
맛집
▽초막(윤정신)=맛있는 쌀에 인삼 은행 대추 고구마 호박씨와 잣을 올려 지은 영양만점의 돌솥 밥(7000원). 열여섯 가지 반찬과 더불어 낸다. 경기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왕산리 428-1(한국외국어대학 앞 사거리). 031-333-9393
캐딜락 ▽모델=2008 New STS 3.6L ▽제작사=GM ▽제원=DI(직분사) 방식의 V6엔진(3564cc)으로 후륜구동에 302마력(6400rpm). 전자동 6단 오토 트랜스미션, 18인치 알루미늄 휠, 내비게이션과 지상파 DMB, Bose 오디오시스템 장착. ▽가격 △3.6L: 6290만 원 △4.6L: 7770만 원. ▽문의=02-3408-6222, 080-011-6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