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엄마 뿌리친 소녀, 죄책감에 자학하다
5·18민주화항쟁을 다룬 영화 ‘꽃잎’에서는 대학생 오빠와 그 친구들 앞에서 꽃을 마이크 삼아 생글거리는 표정으로 노래를 부르는 단발머리의 귀여운 소녀가 나온다. 하지만 다음 장면에서 더벅머리에 누더기를 입고 초점이 없는 눈에 혼자 웃었다 중얼거렸다 하는 소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 증상으로 황폐해진 것이다.
누구나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게 되면 심각한 심리 장애를 보일 수 있다. 이미 다 지난 일인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심한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사건이 머릿속에 떠오르거나, 마치 현재에도 일어나는 것처럼 재경험되며, 심한 경우에는 ‘꽃잎’의 소녀처럼 정신병적 증상을 보이거나 충격적 사건과 관련된 기억을 상실하는 해리 증상을 보이게 된다. 영화에서 소녀가 살아가는 세상은 현재가 아니라 1980년 5월의 광주다. 소녀에게 현재는 언제나 과거와 오버랩되어 아직도 군인들에게 쫓기고,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 위에 내던져진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과거 속에서 소녀는 자기만 살자고 죽어가는 엄마의 손을 뿌리치고 내달린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어머니의 손이 잡고 있었던 자신의 왼쪽 손목을 긁고 자학한다.
아이들은 성인에 비해 외상적 사건의 영향에 취약하다. 보통은 교통사고, 지하철 참사, 화재, 지진, 전쟁, 성학대나 가정폭력 후유증으로 PTSD 증상이 생기지만, 아이들은 집단 괴롭힘을 당해도 PTSD 증상을 보일 수 있다. 아이들의 뇌는 발달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외상적 경험 때문에 정서 반응과 기억 기능을 담당하는 두뇌 부위에 손상을 입기도 한다.
외상적 경험을 겪은 아이들은 자신이 무가치하고 무능력하다는 자괴감이나 수치심을 느낄 수 있고, ‘세상이 위험하고 무서운 곳’이라는 불안감 때문에 집에만 있으려 하기도 한다.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못하고, 스스로 이러한 상황을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내면화되기도 한다. 만일 부모가 더 안절부절못하고 흥분하고 감정 폭발을 보인다면 아이들은 모든 일이 다 자신이 잘못해서 비롯되었다는 죄책감을 느낄 수도 있다. 입 밖으로 내기조차 두렵고 힘든 사건이지만 이를 언어나 그림을 통해 표현하게 함으로써 PTSD 증상을 감소시킬 수 있다. 물론 재현상황은 안전한 상황이어야 한다. 입 밖에 내지 않는다거나, 이 사건에 관한 감정이나 생각에 대해 물어보지 않는 것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감정을 방출할 기회를 차단하게 된다. 상한 음식을 먹었을 때 이를 빨리 배출하는 것이 고통을 줄여주듯이, 고통스러운 기억도 마찬가지다. 불안이나 분노, 죄책감과 같은 정서적 고통은 오래갈 수 있다. 당장 해결하려고 하거나 억제하지는 말아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러한 감정은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스쳐지나가는 것’이다. 부모가 “내가 항상 네 옆에 있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며 자녀 곁에 있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신민섭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