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세계은행이 발표한 ‘기업 하기 편한 나라’ 순위에서 155개국 중 100위를 차지한 나라가 있다. 이 나라는 올해 조사에서 178개국 중 18위로 수직 상승했다. 한국(30위)은 물론 유럽의 경제 선진국 독일(20위)과 프랑스(31위)보다 나은 성적이다. 꼴찌에 가까웠던 열등생이 ‘경제우등생’으로 우뚝 선 것이다.
이 나라는 흑해 연안의 그루지야. 옛 소련의 붕괴로 1991년 독립한 인구 464만 명의 소국(小國)이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국가 중 하나다. 올해 경제성장률은 14%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2003년 11월 23일 신생 독립국 그루지야는 ‘장미혁명’을 통해 세계인의 머릿속에 각인됐다. 시민들은 총선에서 부정을 저지른 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장미 한 송이씩을 손에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이날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시민과 야당의 압력에 밀려 하야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과 냉전 체제를 허문 거물 정치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조차 부패와 경제난을 해결하지 못했다. 당시 ‘장미혁명’을 이끈 지도자가 현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이다.
미국 유학파 출신인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과감한 규제 개혁에 나섰다. 1000가지 이상의 인·허가 규제가 폐지됐고, 국내총생산(GDP)은 2003년의 3배로 증가했다.
하지만 ‘장미혁명’의 달콤한 향기는 서서히 악취로 변해 갔다. 권력에 취한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측근을 대법원장에 앉히고 법을 권력의 하수인으로 만들었다. 여비서와의 염문은 그루지야판 ‘지퍼 게이트’로 불렸다.
빈부 격차 심화 등의 개혁 피로와 네 탓만 하는 정권의 책임 회피에 신물이 난 야당과 시민들은 4년 전처럼 거리로 나섰다. 사카슈빌리 대통령은 이달 7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가 16일 이를 철회하고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정국은 여전히 안개 속이다.
“장미혁명이 시들어간다.”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최근 그루지야의 정치적 혼란을 이같이 전했다.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혁명’, 2005년 키르기스스탄의 ‘튤립혁명’을 촉발시켰던 ‘장미혁명’의 지정학적 파괴력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시장경제와 민주개혁을 통해 시든 장미를 되살리는 일이 다시 그루지야인들의 손에 달렸다. 4년 전 ‘장미혁명’은 과거가 아닌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