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준 씨는 귀국 길에 영화배우 같은 용모에 세련된 맵시를 과시했다. 그는 미국 아이비리그인 코넬대를 졸업한 뒤 시카고대 경제학 석사,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경영학석사(MBA) 학위를 받았고 모건스탠리에서 펀드매니저로 활약했다. 그의 비서였던 여성은 “언변이 좋고 머리가 비상하다”고 말한다. 이 정도의 사람이 투자를 권유하면 누구라도 넘어가기 쉬웠을 것이다.
BBK 사건은 ‘Catch me if you can(날 잡을 테면 잡아 봐)’의 한국판(版) 같은 생각이 든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이 영화는 1960년대의 천재 사기꾼 프랭크 애버그네일의 실화를 소재로 했다. 애버그네일은 팬암항공 부조종사를 가장해 비행기를 공짜로 타고 미국 50개 주 은행을 돌아다니며 위조수표 250만 달러를 남발해 140만 달러를 횡령했다.
김 씨도 조작과 위조에서는 애버그네일 못지않다. 주가 조작 47건, 문서 위조 26건, 위조문서 행사 22건을 저질렀다. 위조 여권으로 유령회사를 만들어 가족과 가공인물 계좌를 통해 384억 원을 횡령했다. 검찰청사 포토라인을 지나며 씩 웃는 모습은 디캐프리오의 연기 같았다.
미국 천재 사기꾼 닮은 김경준
김 씨는 한국의 범죄인 인도 요청에 따라 2003년 5월 미국 베벌리힐스 자택에서 체포됐다. 그는 송환 거부 소송을 내 4년을 끌다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돌연 항소를 취소했다. 김 씨가 한국에서 수사와 재판을 받기로 마음을 바꾼 배경은 무엇일까.
미국 정부 관계자는 흥미로운 음모론을 소개했다. 누군가 김 씨에게 “넌 바보야. 한국에 갔으면 벌써 (형기 마치고) 끝났을 일이잖아. 시설 여건도 로스앤젤레스 연방교도소보다는 한국 감옥이 낫지. 네가 말만 잘하면 모든 일이 오케이야”라고 유혹했을 거라는 시나리오다. 그는 “한국 법무부는 11월 1일 이후 언제든 김 씨를 한국에 데려올 수 있었다. 뭔가 날짜를 맞추는 것 같은데…”라는 기획설도 제기했다.
김 씨가 귀국을 단행한 시점은 구구한 해석을 낳을 만하다. 기왕 올 양이면 한나라당 경선이 시작되기 전에 오든지, 아니면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당선되는지 확인하고 입국할 수도 있었다. 대선 후보 등록을 9일 앞두고 귀국한 탓에 검찰이 선거 전에 진상을 규명할 시간이 부족하다. 수사 중인 검찰이 침묵하는 사이에 김 씨의 부인과 누나는 미국에서 번갈아 의혹 부풀리기 회견을 하고 있다.
우리 대선은 매번 검찰 수사에 물려 들어간다. 김수환 추기경이나 법정 스님이 출마하더라도 아마 반대 정파에서 뭔가 엮어서 고소를 할 것이다.
김성호 전 법무부 장관은 검사 시절 특별수사통이다. 그는 국회의원들의 대정부 질문에 대한 답변 준비를 하면서 BBK 공부를 꽤 했다. 8월 퇴임해 ‘행복세상’이라는 재단법인 설립을 준비하고 있는 김 전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사건 구조는 간단하다. 김 씨가 벤처를 만들어 주가를 끌어올리려다가 잘 안되자 돈을 끌어 모아 미국으로 도망간 사건이다. 김 씨와 공범관계가 성립되려면 이득을 나눠 가졌어야 한다. 자금 추적 결과, 횡령한 돈은 누나와 아내 그리고 여권을 위조해 만든 가공인물 명의의 계좌로 다 빠져나갔음을 확인했다. 이명박 대선 후보는 증권을 잘 몰라 LKe 동업을 했을 때 모든 것을 김 씨가 주도했다.”
김 전 장관의 말을 종합해 보면 건설회사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이 후보는 청계천 복원에는 강했지만 금융에는 약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후보는 어떤 경위로 사기의 백과사전과 같은 ‘뺀질이’와 한때나마 동업을 했을까.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복잡해지는 BBK, LKe, EBK, 옵셔널벤처스코리아, AM파파스에서 이 후보는 김 씨와 도대체 어떻게 엮여 있는가. 이 후보는 정직이 최선의 전략이라는 태도로 분명하게 국민 앞에 말해야 할 것이다.
김 씨 귀국 배경의 ‘음모론’
애버그네일과 김경준은 닮은꼴이지만 체포 후의 행적은 판이하다. 애버그네일은 징역 5년을 복역하고 석방돼 FBI 요원들에게 위조수표 식별법을 교육하고 금융사기 예방과 문서보안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됐다.
그런데 김 씨는 체포되자 미국의 소송제도를 이용해 한국에 오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갑자기 대선 바람을 타고 귀국해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그는 디캐프리오의 미소를 날리며 ‘어디 한번 날 잡아 봐’라고 말하는 듯하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