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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40년 리샤오룽 출생

입력 | 2007-11-27 02:52:00


거울이 가득 들어찬 방. 둘러봐도 적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기분 나쁜 정적 속에 거울에 비친 수천 개의 영상이 그를 노려본다. ‘쉬익’ 날카로운 쇳소리에 칼날이 살갗을 길게 찢는다. 핏방울이 땀에 섞여 바닥으로 떨어진다.

1973년 리샤오룽(李小龍)의 ‘용쟁호투’는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에 동양무술의 위대함을 알렸다.

작은 체구에서 터져 나오는 강한 힘과 믿기 어려운 날렵한 움직임에 극장을 찾은 미국인들은 탄성을 터뜨렸다. 그들의 눈에 늘 약하고 볼품없는 존재로 비쳤던 동양인이 잠재적인 ‘무술의 고수’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1940년 11월 27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리전판(李振藩)은 유명 연극배우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여섯 살 때부터 영화에 출연했다. ‘소룡’이라는 이름도 연극계의 ‘큰 용’인 아버지에 빗대 얻은 예명이다.

영화와 드라마 출연이 잦아지면서 학교 성적은 점점 떨어졌다. 아버지는 결국 그의 영화 출연을 금지했지만 아들은 이미 공부에는 뜻이 없었다. 홍콩의 고교에 입학한 그는 반 친구와 싸웠다가 크게 진 뒤 쿵후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의 쿵후는 정신수양과 거리가 멀었다. 오늘은 당랑권, 내일은 소림권을 전전하며 싸움에 이기는 방법만 빠르게 익혔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홍콩을 떠난 그는 미국 워싱턴주립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2년간 수업을 빠진 채 학교 도서관에서 무예 관련 서적을 독파했다. 이를 바탕으로 무아이타이, 복싱 등 모든 무예의 장점을 종합한 ‘절권도’를 창시했다.

할리우드에서 무술지도를 맡게 된 그는 종종 TV 드라마에 출연해 무술 실력을 과시했다. ‘아뵤’라는 독특한 기합도 이때 만들었고, 화려한 발차기를 맘껏 선보이려면 좁은 브라운관보다 넓은 시네마스코프가 적합하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당산대형’부터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를 거쳐 유작인 ‘사망유희’까지 그는 늘 맨몸으로 거대 조직의 음모와 억압에 맞서는 인간을 연기했다. 1973년 32세로 요절할 때까지 그는 동양인의 자존심을 지키고 동양의 무예와 미를 적극 알린 선구자였다.

수많은 영화와 음악이 그의 옛 모습을 추앙하는 것은 그의 우직한 자존심과 용기가 여전히 숱한 팬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기 때문이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