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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공자의 修身齊家 치중… 治平學에는 소홀”

입력 | 2007-11-27 02:52:00

김미옥 기자


신동준 21세기 정치연구소장 새 저서에서 주장

“세상 물정 모르는 학자가 정계와 학계로 진출하는 한국 정치의 현실은 정치의 요체가 부국강병에 있음을 망각하고 신권정치를 추구한 조선시대의 산물입니다. 통치학의 기본을 모르고 사변적 철학만 하던 서생들이 정치에 나서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학자의 정치 참여를 긍정해 온 한국 전통의 정치관을 매섭게 비판하고 나선 학자가 등장했다. 고대 유학 정치사상의 원형을 추적한 ‘공자와 그의 제자들’(전 2권·한길사)과 그 유학 이념에 입각해 세워진 조선의 정치가 공자의 본뜻에서 벗어났다고 비판한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살림)를 1주일 새 나란히 내놓은 신동준(51·사진) 21세기 정치연구소장.

10년간의 기자 생활을 거쳐 1998년 서울대에서 ‘선진시대 정치사상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신 소장은 10년 동안 번역서를 포함해 30여 권의 책을 펴낸 동양정치사상 분야의 독보적 필자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태동고전연구소에서 배운 한학 실력을 토대로 주로 ‘도학(道學)’의 관점으로 조명되던 유교사상을 ‘사실(史實)’에 의거해 재구성해 왔다.

좌구명의 ‘춘추좌전’, 사마광의 ‘자치통감’, 사마천의 ‘사기’ 등 3권의 역사서에서 춘추전국시대 역사를 뽑아 지난해 10월에 펴낸 3권 분량의 ‘열국지’는 그 전환점이 됐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은 이를 토대로 ‘논어’와 ‘맹자’ ‘순자’와 같은 동양 경전에 대한 기존 해석의 잘잘못을 꼼꼼히 가려낸 저술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공자의 학문(孔學)’이 개인의 도덕성 함양을 강조한 수제학(修齊學)과 제왕의 통치학으로서 치평학(治平學)을 양 날개로 삼았음에도 맹자와 주자가 이를 수제학 중심으로 왜곡한 실태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공자가 역할 모델로 삼았던 자산(子産)은 약소국 정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해 덕치가 아닌 법치를 펼친 인물이었습니다. 그처럼 공자의 치평학은 신권 중심의 왕도(王道)와 왕권 중심의 패도(覇道)를 병용해 부국교민(富國敎民)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치평학의 관점에서 중왕경패(重王輕覇)의 공자, 숭왕척패(崇王斥覇)의 맹자, 선왕후패(先王後覇)의 순자, 중패경왕(重覇輕王)의 한비자로 나눠놨을 때 공자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순자입니다. 그런데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가 법가(法家)를 확립해 진나라의 이데올로그가 되면서 순자까지 통째로 부인된 것입니다.”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는 이런 맥락에서 조선이 ‘공자의 나라’가 아닌 ‘맹자와 주자의 나라’였다고 비판한 것이다.

“평화 시에는 왕도정치가 필요하더라도 비상시에는 패도정치가 불가피한데 조선은 중화질서 아래 오랜 평화를 누리면서 학문이 수제학으로만 치우치고 치평학의 전통을 망각했습니다. 특히 ‘경연’을 통해 주자학자로 키워진 조선의 국왕에게 이는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했습니다.”

신 소장은 조선조에서 신권 강화와 왕권 약화를 초래한 핵심기관으로 성종 때 설치된 최고 학술기관인 ‘홍문관’을 꼽았다.

“사헌부, 사간원과 더불어 3사(三司)로 꼽히는 홍문관을 거쳐야 비로소 3사의 관원과 조정의 요직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 홍문관이야말로 통치학에 대해선 문외한이었던 도학자들만 양성하던 곳이었으니 조선의 정치가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강력한 왕권을 추진했던 정조의 개혁이 실패한 이유도 지나치게 학문에 매달려 정치의 본질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무릇 임금의 도(君道)는 인재를 알아보는 것(知人)에 있고 신하의 도(臣道)는 사물에 정통한 것(知事)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신하들과 지식을 다투는 쟁지(爭知)에 빠져 정작 신하를 쓰는 용인(用人)의 묘를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그 역시 치평의 묘를 터득하지 못한 주자학자에 머물렀던 것이지요.”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